‘비자금’이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다닐 정도로 ‘검은 거래’라 오해받고 있는 한국의 미술시장. 이런 우리 미술시장에서만 통하는 ‘안방미술’이라는 표현이 있다. 반면 세계적으로 통용되지만 국내서만 잘 쓰이지 않는 ‘뮤지엄 아티스트(museum artist)’, 번역하자면 ‘미술관 작가’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 미술시장 유통구조의 문제점이 ‘안방미술’에 있다면 해법은 바로 ‘미술관 작가’에서 찾을 수 있다.
◇미술시장 동맥경화=‘안방미술’이란 이른바 사모님 취향으로 구입 해 안방에 걸어놓고 보는 예쁘고 장식적인 그림을 가리킨다. 이는 진지하고 실험적 미술, 그리하여 장차 국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미술과 대조를 이룬다. 즉 ‘안방미술’은 개인 컬렉터에 의존해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어 확장과 발전이 정체된 미술시장의 현실을 꼬집는다. 꽉 막힌 미술 유통의 문제는 이 같은 ‘안방미술’을 공공의 ‘미술관 미술’로 끌어낼 때 해결될 수 있다. ‘뮤지엄 아티스트’란 말 그대로 미술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이며, 문화 선진국의 경우 미술관에서의 이력이 시장거래에까지 영향을 미쳐 유통 선순환을 촉진한다.
미술경영지원센터가 최근 발간한 ‘2014년도 미술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432개 화랑의 2013년 매출 총액은 1,945억원이었으며 이 중 2.3%에 불과한 상위 10개 화랑이 85.3%(1,658억원)을 차지했다. 전체 화랑의 26%인 113곳은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유통의 쏠림 현상이 극심하다. 동시에 화랑 고객 비중도 개인고객이 76%에 이르고 기업 등 법인은 8%, 미술관은 6%에 그쳤다. 해외시장에서도 미술품 구매의 3분의2 가량이 개인고객인 추세는 비슷하지만 이들의 경우 구입 미술품의 상당수를 미술관에 기증·기부하는 데 반해 우리는 ‘안방미술’에 머무른다는 게 큰 차이다. 이 같은 양적·질적 쏠림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술관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한다. 윤범모 가천대 미술대학 교수는 “전통채묵화나 근대화가, 작고작가, 원로작가 가운데 작품성 높은데도 시장평가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미술관이 제 역할을 못 해줬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미술계가 개인·상업화랑 위주의 시장논리에 끌려가지 않고, 전문성 가진 미술관이 담론을 만들어 주도적으로 이끌 때 비로소 미술시장도 선순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관 주도의 브랜드전략 절실=미술은 공산품처럼 균질한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같은 공장’에 해당하는 ‘동일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작가 개인이 ‘브랜드’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 피카소나 워홀, 국내작가로는 이중섭,박수근 등 이름만으로 작품과 가치를 떠올릴 수 있는 ‘작가 브랜드’가 존재한다. 유통업체인 갤러리의 경우 ‘전속작가’ 제도를 통해 자체 브랜드를 구축한다. 특정 화랑과 독점적 관계를 유지하는 ‘전속작가’는 대형 유통업체의 ‘프라이빗 브랜드(PB·Private Brand)’에 빗댈 수 있는데, 화랑은 전속작가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작품을 거래하면서 작가와 함께 커간다. 국제갤러리의 양혜규·김수자·이우환·김홍석, 학고재의 이용백·이세현·홍경택, 가나아트의 고영훈·사석원, 갤러리현대의 이승택·문경원·전준호 등이 전속작가로 갤러리와 상호협력하고 있다. 갤러리가 젊은작가를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는다면 공신력 있는 미술관은 중견 이상의 작가들을 검증해 브랜딩(branding)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백화점 명품관이 수준과 격을 인정한 브랜드를 엄선해 관리하듯, 미술관도 장차 지역과 국가의 대표 브랜드로 키워낼 작가와 미술경향을 골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 미술관이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재정적·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돼야 한다.
미술시장연구소의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취약한 국내 미술시장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한국미술의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개별경쟁력이 약한 개인 작가보다 공통된 사조로 묶는 그룹작가 브랜드가 필요하다”라며 “1960~70년대 활동하던 원로작가들이 세계무대에서는 덜 알려진 신인급이었으나 ‘단색화’라는 브랜드를 통해 조명받고 나아가 한국미술을 세계화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미술관이 이를 주도해야 하며 지속적인 브랜드 다각화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단색화’ 열풍이 상업화랑인 국제갤러리주도로 일어났지만, 이는 정부지원을 받는 미술관이 했어야 할 역할을 민간영역이 대신 한 것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1980년대 말 유럽미술계에서 뒤지던 영국은 큰 손 화상(畵商)인 찰스 사치가 발굴한 데미안 허스트 등의 ‘YBA(Young British Artists·젊은 영국작가 그룹)’가 주목받았고, 영국문화원이 가세한 세계적 전파로 런던을 유럽미술의 중심지로 올려놓았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미술시장 중장기 발전을 위한 정책에서 미술관 정책의 보완이 지적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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