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고 정부에 있던 사람들도 이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몰랐어요.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협상이 체결되고 나서도 가장 기본적인 품목별 관세율표를 맞추는 작업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첫 FTA인 한ㆍ칠레 FTA를 성사시킨 주역이었던 황두연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3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지난 칠레와의 협상 과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ㆍ칠레 FTA는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을 통상 허브 국가로까지 발전시킨 초석이 된 협상이다.
10년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일까. 한·칠레 FTA 이후 승승장구했던 한국의 FTA 전략이 주춤하고 있다. 속도를 내던 신흥국과의 FTA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통상정책의 키를 다시 거머쥔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한 견제는 여전하고 잇따른 FTA 타결에 따른 농업계의 반발도 거세다. 안팎으로 한국의 통상 정책이 기로에 놓였다.
◇FTA 10년, 체감도는 낮아=FTA를 통해 한국 수출 시장이 빛을 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10년간 FTA 체결로 우리 수출상품에 대한 전세계 관세장벽이 2004년 5.28%(수출액 가중평균 관세율)에서 2013년 4.56%까지 낮아졌다. 무역협회는 FTA를 100% 활용할 경우 관세 절감 금액이 최대 79억9,000만달러(2013년)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수입 농산물이나 식품의 관세 인하에 따른 가격 인하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FTA 효과가 소비자의 후생으로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 칠레 FTA 발효 이후 칠레산 와인에 대한 관세가 2009년 철폐되고 관세에 연동돼 부과되는 내국세까지 대폭 감축됐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가격은 소폭 하락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미 FTA로 수입물량이 크게 늘어난 오렌지 역시 소비자가격은 오히려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다. 수출업체가 FTA에 따른 관세 인하 효과를 염두에 두고 미리 수출 가격을 올렸거나 국내 유통업자들이 대폭 중간마진을 높였기 때문이다. FTA 속도전을 펼쳤던 정부의 FTA 혜택을 국민과 나누려는 노력 역시 부족했다.
◇선진국 패권 경쟁에 위협 받는 통상 허브 프리미엄=FTA 허브로서의 한국의 대외적인 입지도 약해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양자 협상을 통해 공들여 쌓은 통상 고속도로를 선진국들은 다자 협상을 통한 메가 FTA로 일거에 깨뜨리려 하고 있는 탓이다.
미국 중심의 TPP와 중국 중심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격렬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점은 부담이다. 자국 주도의 경제블록에 편입하지 않으면 도태시키겠다는 선진국의 위협에 한국이 선택할 모범 답안은 마뜩지 않다. FTA 허브 국가를 자처하며 TPP는 실익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던 한국은 지난해 일본의 TPP 참여 이후 허겁지겁 TPP 협상으로 빨려들어가기도 했다.
문제는 갑작스러운 TPP 참여로 한국의 통상 정책 방향이 모호해졌다는 점. 선진국과의 FTA가 마무리된 만큼 앞으로는 중국과 신흥국 FTA에 주력해 동북아의 '린치핀(핵심 축)' 역할을 하겠다던 당초의 신통상 로드맵과 달리 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 TPP에 참여한 영연방 3개국과의 FTA가 올해 들어 되레 급속도로 추진됐다. 통상당국은 TPP 국가들과의 FTA를 비롯해 10여개가 넘는 전방위 FTA 협상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허덕이고 있다.
◇흔들리는 신통상 로드맵…전략 보이지 않아=한국 통상정책의 청사진도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의 샌드위치 신세인 한국의 입장에서 미중의 경제 패권 다툼에 하나씩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통상당국의 전략적인 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통상전략인 신흥국 FTA는 이렇다 할 진도를 나가지 못하면서 통상 강국으로서의 차별화를 찾을 수 있느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한ㆍ인도네시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은 양국 정상이 나서 지난해 말까지 타결하기로 했지만 인니 측의 과도한 기업 투자 보장 요구 등으로 지난해 말부터 신경전만 지속되고 있다. 베트남·인도 등과의 FTA 업그레이드 역시 난제다.
우태희 산업부 통상교섭실장은 "전세계적으로 메가 FTA가 체결되는 흐름에서 한국이 이대로 머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FTA를 확대하면서도 산업 연관 효과와 국민 체감도가 높은 FTA를 만들기 위해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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