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램블(scramble)!’ 긴급발진 명령을 받은 자위대의 팬텀기 두 대가 급히 떠올랐다. 일본 영공을 침범한 국적 불명의 비행물체를 요격하기 위해서다. 초저공 비행으로 추적을 따돌린 비행물체는 홋카이도 하코다테공항 상공에 나타났다. 관제탑의 경고를 무시한 채 착륙을 강행한 기체는 활주로를 185m나 벗어난 뒤 가까스로 멈춰섰다. 소련 극동공군 소속 벨렌코 중위 망명사건의 개요다. 사건 발생 일시 1976년 9월6일 오후1시57분. 소련은 즉각 기체 반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불응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에 아랑곳없이 미국과 일본은 기체를 뜯었다. 순간속도 마하 3.2를 기록한 ‘환상의 전투기’, 서방진영의 어떤 전투기로도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공포의 존재’를 해부한 미국과 일본의 기술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엇보다 진공관이 나왔다. ‘트랜지스터를 넘어 반도체 시대에 접어든 게 언제인데 무겁고 부피가 크며 쉽게 깨지는 진공관이라니!’ 가볍고 강한 티타늄 특수합금이라고 추정했던 기체의 재질은 강철이 대부분이었고 고속비행에서 선회 기동시 휘어지기 쉬운 알루미늄 합금도 섞여 있었다. ‘환상의 전투기’라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었던 셈이다. 망명사건에 따른 각국의 손익계산서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소련의 기술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미국제 무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소련은 통신ㆍ암호체계 전면 개편에 최소한 20억루블을 썼다. 실제 지출비용이 수백억루블에 달해 항공모함 두 척의 건조가 취소됐다는 분석도 있다. 소련제 전투기를 사려는 국가도 줄어들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된 일본은 방공망의 취약성을 부각시키며 군비 증강에 수백조원을 퍼부었다. 조기경보기와 F-15전투기, 이지스함의 도입이 추진된 게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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