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흔히 19세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처럼 '비운의 화가'로 기억된다. 가난했고 육체·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었으며 결국 마흔을 못 넘기고 요절했다. 또 생전에는 가난에 시달리다 사후에야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점도 마찬가지. 비슷한 시기 파리에서 91세까지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며 살아서 큰 명성을 얻었던 파블로 피카소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그는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 보니 생전에 그림 한 점 제대로 팔기 어려웠고 첫 개인 전시회마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당국의 철거명령을 받았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모딜리아니는 그가 겪은 여인들의 초상화를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려 넣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내면의 세계에 천착했다.
1984년 이탈리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21세에 파리로 건너와 당대 유명했던 피카소 등과 교류했지만 어떤 화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화풍을 구사했다. 수려한 외모의 그를 스쳐 간 여인이 많지만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딜리아니에게 술과 마약을 전해준 시인이자 기자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다. 어린 시절부터 결핵을 앓아 병약했던 그가 건강을 망친 계기가 됐다는 분석과 그에게 영감을 준 첫 뮤즈였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생의 끄트머리에 만난 헌신적인 반려자이자 아내 잔느 에뷔테른느를 빼놓고 그를 말할 수 없다. 파리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19세의 에뷔테른느는 1917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열네 살 연상의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빠졌고 곧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첫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태어났고 모딜리아니는 술과 마약을 줄이며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를 그린 작품만 20여점. 그녀와 함께한 3년의 짧은 기간 모딜리아니는 보다 밝고 경쾌한 색채로 캔버스를 채우고 배경도 밝아진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고 결국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35세에 결핵으로 생을 마감한다. 장례 치를 비용조차 없었던 에뷔테른느는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를 거절당하자 임신 9개월인 몸으로 모딜리아니 사망 다음날 새벽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다. 겨우 스물둘의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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