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합을 핵심으로 하는 창조경제의 목적은 결국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데 있고 새로운 산업은 모두 기초원천연구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정부와 민간 연구개발(R&D)의 패러다임을 기초원천연구 중심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창조경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새 정부의 핵심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가 등장한 후 과학계와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서는 창조경제의 개념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과연 창조경제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 정부 R&D 예산 집행을 총괄하는 이승종(62ㆍ사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창조경제의 목표는 경제발전이고 이는 신산업과 일자리 창출을 뜻한다"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창의성과 융복합"이라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창조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제 R&D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단기 성과에 주안점을 두는 프로젝트 중심의 연구에서 벗어나 기초원천연구 쪽으로 R&D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런 면에서 이 이사장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 민간 부문의 R&D다. 그는 "민간 부문, 특히 대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많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개별 프로젝트 중심으로 돼 있다"며 "창조경제가 신산업 창출이라는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정부의 R&D 지원이 대기업의 기초원천연구 투자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정부가 1,000억원을 대기업에 지원하면 해당 기업은 2,000억~3,000억원을 투입해 기초연구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원천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 못지 않게 맞춤형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이 이사장은 지적했다.
"단순히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보다는 지원방식의 변화와 기초연구투자 포트폴리오 조정 등을 통해 기초연구 R&D 전략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투자 비중 확대를 계기로 기존 사업 중심의 연구비 지원에서 학문 분야별 특성에 맞는 지원체계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 이사장은 "일괄적 지원보다는 연구기간이나 연구비 규모, 평가방식 등을 수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R&D의 질적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한국형그랜트(Grant)'제도의 확대나 우수성과에 대한 후속지원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형그랜트 제도는 주요 연구성과를 온라인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정산보고서 제출을 최소화하는 게 핵심이다. 행정업무나 성과 창출에 대한 부담을 줄여 창의적 연구에 나설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오랜 기간 노력을 들인 연구 성과가 사업화되지 못하는 이른바 '죽음의 계곡'이 많다는 지적에 이 이사장은 "이는 결국 기술과 시장 사이의 간극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현재는 기초연구 성과 단계에 있지만 앞으로 대형 성과물로 발전할 수 있는 사업을 떡잎 단계에서부터 발굴한 뒤 세제 등 정책적인 지원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보유한 특허기술 3건 가운데 1건 정도만 사업화로 연결되고 나머지 2건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R&D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한국연구재단은 이를 위해 출연연구기관 등에서 나온 기초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데이터베이스(DB)화하고 키워드 별로 잘 분류해서 이들을 산업체에 연결해 줄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국내 연구 풍토 가운데 실패가 별로 없는 부분이 가장 아쉬운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연구일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다"며 "우리나라 연구의 실패 확률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시도를 안 한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연구재단은 창의적 연구 시도를 더 많이 하도록 하기 위해 성실실패용인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도전을 주저하게 된다"며 "성실한 연구자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더 많이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지표를 개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창업 풍토도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업이 활성화된 이스라엘의 경우 몇 번을 실패하고도 성공하는 사례가 아주 많다"며 "우리나라도 정부가 나서 바람직한 창업 분위기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창업자들이 몇 번 실패해도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것은 투자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서 하기 때문에 한 번 실패하면 바로 신용불량자가 되고 빚 때문에 재기의 꿈은 꾸지 못하게 된다"고 아쉬워 했다. 이 이사장은 "따라서 투자의 개념으로 유도해주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내 R&D가 양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올라왔지만 질적성장은 미흡하다는 지적에 대해 이 이사장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2011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중은 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4위를 기록하고 있고 세계 학술지에 발표되는 논문 수는 5~6위 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의 피인용 횟수는 세계 20~30위에 머물고 있다. 이 이사장은 "다행히 최근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횟수가 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전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논문 피인용 횟수를 보면 대개 1만회 정도이고 통상 5,000회를 넘으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데 우리의 젊은 연구자들도 그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R&D의 질적성장을 위해 "학문 분야별 특성과 수요를 반영해 예산을 배분할 것"이라며 "연구현장의 의견을 담아낼 수 있는 개방형 상시 기획을 추진해 국책연구사업의 전력적 기획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해 도입한 '책임전문위원제도(CRB)'를 정착시켜 분야별 연구현황을 반영한 전문성 있는 연구기획과 지원, 성과관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연구재단은 1년차 단계평가를 폐지하고 3년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모험연구의 경우 다양한 연구주제를 기획ㆍ수행할 수 있도록 연구자가 연구비의 적정 규모를 제시하도록 할 예정이다. 그는 "도전성ㆍ창의성 항목 배점을 늘려 연구자의 역량보다 연구의 창의성과 파급효과를 중심으로 지원 연구과제를 선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사업관리전문가(PM) 주도의 모험연구 과제선정을 통해 평가 단계를 축소하고 모험연구평가위원회에서 적합성 평가로 모험연구의 목적성을 강화하겠다는 게 이 이사장과 연구재단의 방침이다.
국민적 관심사인 노벨상 이야기가 나오자 이 이사장은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벨상 배출 국가를 보면 기초원천연구 투자 역사가 적어도 50년에서 100년은 된다"며 "우리의 경우 제대로 된 R&D 투자가 1990년 정도에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인내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초과학의 토대가 탄탄해지면 그 바탕 위에서 노벨상이라는 결실이 맺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급하게 결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토대를 먼저 탄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또 ICT가 융복합 연구를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이사장은 "우리 산업 분야 중 ICT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ICT가 다른 산업을 끌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만간 사람이 운전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운행되는 자동차가 대중화되고 의료산업에서도 ICT가 접목돼 수명이 10~20년은 더 늘어날 것"이라며 "이 모두 ICT가 다른 산업과 융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 이사장은 우리의 국가경쟁력으로 미뤄볼 때 과학선진국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MPI)를 벤치마킹해 출범한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제 역할을 해나갈 것이며 정부 출연연구기관들도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는 게 이 이사장이 자신감을 갖는 근거다.
예컨대 연구재단은 NT(초정밀나노산업)ㆍBT(생명공학산업)ㆍET(환경공학산업) 등의 고위험ㆍ고수익형 융합원천 기술 개발을 목표로 전년 대비 21% 늘어난 334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또 인문사회 분야 지원 몫으로도 올해 5,000여개 과제 2,082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2009년 1,536억원 대비 36% 증가한 것이다. 연구재단이 융복합 추세를 감안한 지원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표절 뿌리뽑기, 제재만으론 한계… 대학 스스로 정화 시스템 구축을" 권대경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