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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핀 도시… 로마숨결이 가득

독일 트리어<br>대성당·검은 문 등 로마시대 대표 유적지 즐비<br>로코코양식 선제후궁전의 핑크빛 외벽 인상적<br>마르크스 태어난 생가엔 중국인 관광객 몰려

검은 문(Porta Nigra)


카를 마르크스 생가

'공산당 선언' 책자

중앙광장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는 관광객들

트리어 대성당 내부의 화려한 천장

갑자기 시야에서 도로가 사라졌다. 시속 120㎞로 달리던 자동차가 급감속했다. 물안개였다. 오전10시 무렵인데도 천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다. 고속도로 옆을 보니 푸르디 푸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 북동부 보주산맥에서 발원해 룩셈부르크를 거쳐 독일 코블렌츠에서 라인강에 합류하는 모젤강이다. 운전대를 잡은 가이드는 "일교차가 심한 가을철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귀띔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물안개 지역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를 알리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트리어다. 트리어는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일 하면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ㆍ뮌헨ㆍ함부르크ㆍ쾰른 정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도시, 알고 보면 관광지로서 녹록지 않은 경쟁력을 갖췄다. 쾰른ㆍ아우크스부르크와 함께 독일 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기원전 15년 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마을이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서부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의 요지였다. 로마제국의 유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중국인에게 트리어는 성지(聖地)나 다름없다. 사회주의를 창시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전에 찾은 트리어는 고즈넉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오가는 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관광객과 주민에게 물어 물어 마르크스의 생가를 찾았다. 3층 높이의 생가 앞에 입간판이 놓여 있는데 한자로 '환영(歡迎)'이라고 적혀 있다. 입장료가 적힌 안내판에도 한자가 병기돼 있었다.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배려라고 했다. 실제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절반 이상은 중국인이라고 한다. 내부에 비치돼 있는 백과사전 두께의 방명록도 90% 이상이 한자였다. 들춰보니 "마르크스 형님 존경합니다" 식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보던 '공산당선언' 책자도 전시실에 비치돼 있다. 마르크스는 지난 1818년 5월5일 이곳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다. 본대학으로 진학하면서 트리어를 떠난 후 베를린ㆍ파리ㆍ브뤼셀에서 살다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투쟁을 부르짖었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위세는 20세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자본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사회주의가 패배했다는 진단도 이미 나와 있다. 생가의 기념품 가게에는 마르크스의 얼굴을 인쇄한 T셔츠와 머그잔ㆍ열쇠고리 등이 판매되고 있는데 와인도 진열돼 있다. 모젤 지역은 포도주로 유명한데 이른바 '칼 마르크스 레드와인'은 7.99유로(한화 약 1만2,000원)였다. '고향에서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르크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씁쓸했다. 생가를 나오니 중국인 관광객 3명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부산했다. 용기를 내 혼자 여행을 온 중국인 여성에게 부탁해 인증샷 한 컷을 찍었다. 트리어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넓은 광장이 나온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인 중앙시장(Hauptmarkt)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정오 무렵이 되자 햇볕이 잘 드는 노천 카페는 이미 만원이다. 대부분 50~60대 노인이었다. 생맥주나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광장 인근에 우뚝 솟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4세기께 지어진 이 대성당은 쾰른 대성당, 마인츠 성당과 함께 독일의 3대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트리어 대성당은 예수가 죽었을 때 입었던 성의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몇 년에 한 번씩 공개하는데 이때에는 성의를 직접 보려는 가톨릭 신자들이 세계 각국에서 성당을 찾는다. 대성당 바로 옆에 돔 형식의 아담한 성당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때마침 일요일 교중미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와는 달리 수녀님도 보이지 않고 복사도 없었다. 주임신부 혼자서 200여명의 영성체를 집전했다. 검은 문(Porta Nigra)은 대성당과 함께 트리어를 대표하는 로마시대 유적이다. 로마시대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도시 방어용 성벽의 문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4대문 중 북문에 해당하는 숙정문 격이다. 지금은 성벽은 사라지고 문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검은 문이라는 명칭은 말 그대로 외벽이 검기 때문인데 주재료인 사암은 시간이 흐르면 검게 바뀌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트리어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다. 시티투어 버스나 관광열차를 타고 시내 중심을 빠져나오면 외곽에 1세기 후반에 지어진 2만석 규모의 원형 경기장과 4세기 후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만들게 했다는 대형 목욕탕인 '카이저 테르멘'의 일부가 남아 있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선제후 궁전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코코 양식 궁전으로 꼽히는 선제후 궁전은 핑크 빛 외벽이 인상적이다. 트리어는 9세기에 대주교가 있는 관구가 됐는데 대주교가 영주로서 트리어와 인근 도시를 통치했다. 트리어 대주교는 12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이 선제후로 임명했는데 궁전의 화려함을 보면 당시 선제후의 막강한 권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제2의 로마'라고 불리는 트리어를 돌아보며 역사의 유전을 생각했다. 전성기 때는 거의 모든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까지 영토를 확보했던 로마제국의 후손은 지금 심각한 재정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 반면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18세기까지 제대로 된 나라조차 세우지 못했던 게르만민족의 후손은 탄탄한 경제를 바탕으로 유럽 재정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가 현재의 행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곳, 트리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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