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입사한 기자는 여전히 미혼이다. 'X세대' '오렌지족' 등 화려한 수사를 안고 대학에 입학한 뒤 외환위기의 강풍 속에 졸업과 동시에 백수로 전락한 첫 세대였다. 하지만 위기 이후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면서 지난 십수년간 선시장의 '매물'로 존재하는 호사(?)를 누린 단군 이래 첫 여성 세대가 됐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극에 달할 무렵 듣게 되던 낯선 여성들의 목소리는 입사 6~7년여를 기점으로 달라졌다. '선시장의 필수요건'인 출신대학 대신 고교 이름만 묻는 게 일반화됐다. 고교를 알면 대학이 보이고 가정의 재력까지 알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답변이었다.
'고교 평준화' 제도가 도입된 지 올해로 40년. 우리의 교육환경은 평준화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난 외국어고ㆍ과학고ㆍ자율형사립고 등은 옛 명문고의 위상을 대신한다. 그런데 이들 고교의 입학에는 전과 같은 타고난 실력보다 유아기 이후 사교육 등 '부모의 부'가 좌우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전 명문고가 전국에 산재했다면 현 우수 고교는 유독 서울에 집중돼 '서열화'의 질도 나빠졌다.
보수-진보 진영은 교육이념과 관련해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한 가지 명제에는 완벽히 일치하고 있다. 평준화의 이웃 격인 '쉬운 수능' 기조가 그것이다. 보수 진영은 학생 각자의 꿈과 끼를 위해, 진보 진영은 입시부담 해소를 목표로 이를 주창한다. 중학 과정은 학생 백분율로 성적을 평가하는 '상대평가'에서 일정 점수 이상이면 모두 같은 등급을 주는 '절대평가'로 전환했다. 고교도 수학능력시험 영어과의 절대평가 전환, 문ㆍ이과 수학 통합, 절대평가 내신의 대입 반영 등 쉬운 시험 기조가 '초읽기'다.
하지만 현 체제에서 시험만 쉬워진다면 학생 간 변별력이 사라져 판별의 기준이 될 기타 요소가 개입되기 쉬워진다. 가장 큰 수혜자는 외고ㆍ과학고ㆍ자사고 등 일명 브랜드 고교다. 실제 올해 서울 일부 주요 대학에서 일반고 졸업생의 입학 비율이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다. 부모의 부에서 시작된 고교 선점은 쉬운 시험에 따른 대학 선점으로 탄력을 받아 직업 선점으로 완성된다. 최대 30년 역사에 불과한 외고는 '법조인 사관학교'로 우뚝 선 지 오래다.
이달 1일 13인의 진보 교육감이 주축이 된 '민선 2기' 교육감 체제가 전국 17개 시도에서 출발했다. 이들 역시 공교육 정상화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평준화 제도의 개혁에는 침묵한다. 중장기적으로 '대학 서열화'를 없애는 것만이 개혁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 체제로 부의 대물림만 강화된다면 더 늦기 전에 개혁 방향부터 고민해야 옳다. 아니라면 '현실에 이반하는 이념'을 수정 않는 정직한 속내부터 답해야 한다.
민선 2기 교육감들이 우선해야 할 과제 역시 고교 정상화를 위한 평준화 제도의 근본 개혁에서 멀지 않다. 마침 비진보 진영인 교총도 일반고 정상화 방안 중 하나로 외고ㆍ과학고 등의 '설립취지에 걸맞은 개혁'을 제안했다. 근본개혁 없이 '입바른 성찬'만 반복된다면 경제위기 와중에 되레 10%대의 지지율로 낙하, 중도세력과 통합해서야 명맥을 유지한 야권의 전철이 반복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희원 사회부 차장 heewk@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