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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사라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잘못된 학설이 백성들을 기만하고 인의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맹자, 등공부 하편)
묵가는 전국시대(B.C. 403년~A.D. 221년) 유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로 유행했던 사조다. 춘추시대(B.C. 770~B.C. 403년) 말엽 공자가 활동했고,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극복하고자 했던 게 묵자다. 그리고 다시 맹자가 묵자를 '묵적'(묵자의 본명)이라 언급하며 배척하게 된다.
다시 말해 묵자는 지금으로부터 2,300~2,500년 전, 겸애(친소 차별 없는 사랑)와 비공(침략하는 전쟁에 대한 반대), 의정(의로운 정치)을 주장했던 사상가이자 활동가다. 그는 당시 신분이 낮은 공인 출신으로 보이며, 그를 따르는 무리인 묵가도 공인과 장인, 무사들로 구성됐다. 묵가는 여러 제후와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한편, 강대국의 침략을 당한 약소국을 대신 방어해주는 역할을 맡은 일종의 결사체였다.
묵가는 책과 문헌을 정리하는 설서(說書), 수공업ㆍ군사 기술을 익히는 종사(從事), 사상 전파를 위한 논증과 언변을 닦는 담변(談辨) 등 세 부류로 전문가를 양성하고, 철처한 분업과 협업 체제를 지향했다.
그러한 묵가가 유가와 부딪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묵자는 공자의 인의(仁義)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지만, 사상의 발전 양상은 달랐다.
유학의 핵심은 인(仁)이고 '친친(親親)'이다. 남의 일을 내 일 같이, 남을 내 가족 같이, 남의 부모를 내 부모와 같이 사랑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또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스스로를 갈고 닦아 그 이로움을 남에게로 넓혀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차별적인 것이고 이를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맹자에게 위나라 혜왕이 이로움(利)을 물으면 "단지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왕ㆍ대부ㆍ선비ㆍ백성들이 모두 이익을 탐하면 갈등과 투쟁이 벌어지고, 이는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묵가의 겸애(兼愛)는 보편적인 사랑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고,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최대 다수의 기초 생활 보장'에 가깝다. 이(利)에 대해서도 "의(義)는 곧 이(利)"라고 말한다. 묵가의 이(利)는 서로 다투는 이익이 아닌, 정당한 기준에 따라 나뉘고 공유되고 분배되는 이익이다. 義에 기초한 이익, 義가 전제된 이익, 그리고 그것을 확대 보장하는 겸애인 것이다.
이 같은 묵가는 전국시대가 끝나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가 들어서자 평화시대에 불필요한 군사집단으로서 배척 당하고, 이어 들어선 한나라의 지배이념인 유가세력에 의해 또한 견제 당하며 잊혀져 갔다. 이는 19세기 들어 청나라 때 필원과 손이양에 이해 다시 복권될 때까지도 이어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국 철학이나 고전을 잘 모르는 사람도 묵자 사상의 정수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썼다. 특히 유가와의 비교를 통해 묵자의 의의를 증명하는 데 지면을 할애한다. 기존 질서의 지배층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들이 거듭나야 한다고 했던 공자와, 당장 비지배계층 즉 하층민에 대한 분배와 가장 기초적인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대비시키며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특히 공자의 제자 중 가장 과격했던 것으로 묘사되는 자로(子路)를 '공자 학단의 야당'이라고 표현하며, 묵가사상의 비조(시조)로 연결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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