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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외환위기후 10년…

지난 97년은 한일합방 이후 최대의 ‘국치(國恥)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빚쟁이들은 문 앞에 줄을 서서 돈 달라고 아우성인데 나라 금고는 바닥나 빚을 못 갚았다. 해외 언론들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느니, 한강의 기적은 모래성에 불과했다느니’하는 비아냥조의 기사를 내보냈다. 급기야는 나라의 통치권, 최소한 경제, 금융 통치권을 IMF라는 국제금융기구에 넘겨주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강했다. 특히 나라의 미래가 풍전등화 같던 상황에서 ‘금 모으기’ 의병대가 분연히 일어섰다. 언론들은 하나같이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위기를 돌파하자고 격문을 띄웠다. 관료들은 부실화된 금융기관과 기업을 구조조정하느라 밤을 새웠고 기업체 임직원들은 무너져가는 우리 회사를 살려보자고 뛰고 또 뛰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은 정부와 국민이, 회사와 근로자가 모두 비장한 각오로 뭉쳐 혼연일체의 참하나가 되었다. 이제 외환위기 1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다. 제일 먼저 외환보유액이 약 2,400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풍족해졌다. 이제는 한국은행장의 말 한마디에 뉴욕의 국제금융시장이 요동을 칠 정도가 됐다. 물가가 안정된 상태에서 경제성장을 지속해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2만달러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우리의 산업구조도 굴뚝산업 중심에서 점차 ITㆍCTㆍBT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비보이 강국이 될 줄 누가 알았는가. 기나긴 구조조정을 거친 우리 금융기관과 기업은 이제 초우량기업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의 수출을 견인해 드디어 수출 3,000억달러 시대를 열었다. 얻은 것이 있는 반면 잃은 것도 있다. 최근 3~4년의 투자부진으로 성장 잠재력이 많이 유실됐다. 우리가 고도성장을 해오던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투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상회했었지만 지금은 겨우 10% 수준에 턱걸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난 5년간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보다 1%포인트 정도 밑돌고 있다. 실업, 특히 청년실업은 늘고 가계소득(GNI) 역시 정체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가 그렇게 시정하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소득계층간 양극화 문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모두 다 투자가 줄고 경제가 저성장 기조로 들어간 데 기인하는 것이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놔두면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진단이 나오고 있다. 가장 많이 잃은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나로 뭉쳐 열심히 뛰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장잠재력이 떨어진 것은 다시 확충하면 된다. 경기가 살아나면 실업도 줄고 소득 양극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의 상황은 어떤가. 노(勞)와 사(社)가, 정부와 언론이, 강남과 비강남이 가능한 모든 분자 단위로 분열해 연일 싸우기만 한다. ‘4천만이 모여 하나로 결집’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가 4천만으로 분열’하고 있다. 이제 곧 국민소득 2만달러가 된다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유럽 제국은 수백년을 부자로 살아왔다. 미국은 백년 이상을 세계 최고 선진국으로 살아왔다. 러시아도 요즘 조금 어려울 뿐이지 불과 몇 십년 전에는 미국과 함께 우주 경쟁을 벌이던 국가이고 중국 역시 수천년을 세계의 중심에서 살던 나라이다. 그 나라들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온 유무형의 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또다시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외환위기 때가 ‘흥청망청 소비’라는 샴페인였다면 지금은 ‘자만심’이라는 샴페인이다. 우리가 잃은 것 중 그 무엇보다도 뼈아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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