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화 상승세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미국과 유럽 간의 환율전쟁이 발발할지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강달러에 수출, 기업 실적, 인플레이션 등 미 경제가 전방위 타격을 받으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 시기 연기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스텔스(stealth)' 식 환율전쟁에 이미 참전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유로ㆍ달러 환율은 1유로당 1.1094달러를 기록하며 전날보다 0.5% 하락했다. 3거래일간 유로화 가치는 달러 대비 3%나 급락하며 3월16일 이후 5월15일까지 상승분인 9.6%의 3분의1 이상을 내줬다. 이는 그동안 디플레이션 공포 완화 등으로 촉발된 유로화 급등이 과도하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ECB의 견제구가 유로화 약세를 이끌고 있다. 전날 브누와 쾨레 ECB 집행이사는 런던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7월 중순부터 9월까지 전통적으로 유동성이 줄어드는 여름 휴가철에 대비해 5ㆍ6월에 국채를 추가 매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매달 600억달러로 정해진 자산 매입 규모를 일시적으로 늘리는 대신 이후에는 줄이겠다는 뜻이다. 그는 "(유럽 국채수익률 상승 등) 최근 일련의 시장 변동성과는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얼핏 조삼모사로 보이지만 ECB가 또다시 환율전쟁에 불을 질렀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일시적이지만 자산 매입 규모를 늘릴 경우 국채 수익률과 유로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일 크리스티앙 노이에르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도 "ECB는 필요하다면 채권 매입 프로그램을 연장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유로존 경제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일각에서 제기한 양적완화 조기 종료설을 일축한 셈이다. 한스 레데커 모건스탠리 글로벌 환율 전략가는 "ECB는 지금의 매우 어려운 (경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유로화 약세 환경을 만들고 싶어한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잠시 주춤했던 '달러 강세-유로화 약세' 기조가 재연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올해 말 유로ㆍ달러 환율이 1.05달러를 기록하며 현 수준보다 6% 정도 더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1유로=1달러'를 뜻하는 '패리티' 전망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에릭 크리텐던 롱보드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올해 말 유로화 가치가 달러화 대비 15% 더 떨어지면서 패리티 밑으로 추락할 것"이라며 "유로화 비중을 크게 줄이는 중"이라고 말했다.
ECB의 도발에 연준의 고민도 깊어질 게 뻔하다. 미국 역시 올 2ㆍ4분기 성장률 전망치가 갈수록 하향 조정되는 등 소프트패치(경기 회복기의 일시적 둔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이 마이너스 금리마저 용인하는 판에 미국만 기준금리를 올릴 경우 달러화 강세로 인플레이션 하락 압력이 커지고 시중금리 상승으로 미 기업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연준이 이날 공개한 4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록에 따르면 다수의 위원들은 미진한 경기 회복세를 이유로 6월 기준금리 인상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특히 일부 위원들은 "수출에 미치는 달러화 강세의 부정적인 효과 등이 당초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다"며 "주요 유럽 국가들의 마이너스 국채 금리가 미 달러화 강세를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지목했다.
연준이 유로화발 환율 리스크에 주목하면서 미국과 유럽 간의 환율전쟁이 발발할지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현재로서는 연준이 노골적으로 환율전쟁에 가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올해 안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앞두고 있어 달러화 강세 기조는 불가피한데다 유럽ㆍ일본ㆍ신흥국 등에 이어 연준마저 통화가치 절하 경쟁에 나설 경우 글로벌 경제가 공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환시장에 대한 구두 개입, 점진적인 금리 인상 시사 등 강달러 속도를 늦추기 위한 연준의 발걸음이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3월18일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달러 강세로 수출 증가세가 약화되면서 확실히 올해 성장 전망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밝히자 달러화 가치가 급락한 게 단적인 사례다. 최근 빌 그로스 야누스캐피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연준이 달러화 약세 유도를 통해 전세계 중앙은행들의 환율전쟁이라는 특별한 갈등에 합류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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