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신예작가가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거머쥐고 유럽 지역에서 잇따라 러브콜을 받으며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고쳐 쓰고 있다. 주인공은 정유미(33·사진) 작가. 그는 최근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서 작품 '연애놀이'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일본 히로시마, 캐나다 오타와, 프랑스 앙시 영화제들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영화제에 한국은 지난 15년 동안 초청됐지만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은 정 작가가 처음이다.
정 작가는 지난 1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예상 못 했던 큰상을 받아 얼떨떨하다"며 "힘든 순간마다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게 수상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작품 연애놀이는 두 젊은 남녀가 한 공간에서 펼치는 여러 소꿉놀이를 담은 15분짜리 흑백 영상이다. 성숙하지 못한 두 남녀의 연애과정을 위트를 섞어 은유적으로 대사 한 마디 없이 표현해 마치 무언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연애와 사랑은 전세계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소재잖아요. 힘든 시기를 거쳐 성숙해가는 남녀의 관계를 솔직히 담아내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전반적인 우울한 분위기는 작품을 만들던 당시 제 자신의 경험과 느낌이 투영됐고요."
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연애놀이는 이미 체코 월드 애니메이션 영화제, 홀란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 20곳이 넘는 국제상을 수상했다. 국내 제작·배급사인 컬쳐플랫폼의 도움을 받아 유럽 공영예술채널 아르떼(Arte) TV에도 수출돼 방영됐다. 해외 애니메이션시장이 정 작가에 주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인 '먼지아이(Dust kid)' '수학시험(Math test)' 등은 2009~2010년 칸 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 등에 초청됐었다. 올해 '먼지아이'는 볼료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볼로냐 라가치' 대상을 한국 그림작가로는 처음으로 받았으며 남미 6개국에 판매됐다.
연애놀이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2년 동안 각본을 쓰고 제작을 거쳐 2012년 완성했다. 연필 등 전통적인 드로잉 기법으로 꼬박 1년 동안 정 작가 등 3명이 그림 4,000여장을 그려 영상을 만들었다.
정 작가는 "개별 에피소드로만 남녀 간 심리를 스토리로 엮어내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긴 시간 동안 그림만 그리는 것도 지난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비(非)상업적 작품이다 보니 개인 창작작업이 갖는 한계가 큰 장애물이었다. 주위의 도움도 많지만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긴 작업기간 창작활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수차례 오고는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작품에 대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끊임없는 회의가 밀려오지요."
이 같은 위기의 순간들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그냥 일을 하는 것'이라고 정 작가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자기비판보다는 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고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그다음 단계가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이후 2005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처음 애니메이션을 접하고 순수미술과 애니메이션을 병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회화를 전공한 학생들도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취직 같은 주변의 현실적 문제와 밀려오는 회의에 부딪쳐 이겨내는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후속 단편작을 이달 내 마무리하고 내년 상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새 작품도 성장을 소재로 구성됐는데 프랑스 애니메이션재단과 일본 영화제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 받았다. 연애놀이를 그래픽으로 구성한 책도 하반기에 내놓을 예정이다. 애니메이션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일종의 수익사업이다.
아직은 비상업적 단편 애니메이션에 집중하고 싶다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결과들이 쌓이면 사람들의 평가도 자연스레 뒤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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