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인도 경제가 회복기로 접어들었을 때 기준금리를 더 빨리 올렸더라면 지금보다 형편이 훨씬 나아졌을 것입니다".
외국 투자자금 이탈로 인도 루피화 가치가 수직 하락하는 가운데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인도중앙은행(RBI)의 두부리 수바라오 총재가 퇴임을 앞두고 한 말이다. 이례적으로 통화정책의 잘못을 일부 시인한 수바라오 총재의 발언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연준 의장으로서 실수를 했다"고 고백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의장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바라오 총재는 29일 뭄바이에서 임기 중 마지막 공개연설을 통해 "RBI의 시장안정대책이 충분하지 않고 시장에 오히려 혼동을 준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고 운을 뗀 뒤 "시장과의 소통이 미흡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며 이같이 정책적 과오를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수바라오 총재는 다음달 4일 퇴임할 예정이며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교수가 자리를 물려받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수바라오 총재의) 연설 대부분이 RBI의 과거 정책을 변호하는 내용이었지만 RBI의 성향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 잘못을 인정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수바라오 총재가 인정한 것처럼 RBI는 시기를 놓친 뒷북 통화정책과 방향성을 상실한 대응으로 시장의 혼란을 오히려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RBI는 2008년 8월 9%였던 금리를 불과 9개월 사이 거의 절반인 4.75%까지 내렸다. 이후 물가가 고공행진하자 금리를 2010년부터 이듬해까지 13차례에 걸쳐 8.5%로 급격히 올렸다.
그리고 지난해 4월부터 올해 5월까지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7.25%로 낮췄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금리 인상과 인하가 인도의 경제상황에 비해 한 박자씩 늦었고 지금도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금리인상을 단행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등과 달리 여전히 금리카드를 꺼내지 않고 있다.
유동성 공급에서도 RBI는 갈짓자걸음을 해왔다. 5월부터 줄곧 루피 유동성을 거둬들여 환율방어에 나서더니 20일 국채금리가 급등하자 800억루피에 달하는 장기국채를 매입하며 루피를 다시 시중에 풀었다. 또 달러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기업과 개인의 해외투자 및 송금 상한액을 정하더니 반발이 심해지자 더 이상의 규제는 없다고 뒤늦게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이날 수바라오 총재는 자아비판 외에 정부에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그는 "루피화 가치 급락의 모든 원인을 미 연준에 돌리고 있지만 근본 원인은 경상적자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라며 이를 정부 정책 탓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2009년부터 3년간 정부의 느슨한 재정정책으로 중앙은행의 운신폭도 줄어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는 재임기간에도 정부와 자주 의견충돌을 빚어왔다.
금융시장은 이제 RBI 총재의 바통을 이어받을 라잔 교수가 내놓을 대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WSJ는 라잔 교수가 1980년대 초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린 폴 볼커 전 연준 의장과 같은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라잔이 '인도판 볼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WSJ는 전문가를 인용해 "인도에 남은 카드는 급격한 금리인상밖에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다만 인도 금융시장 내 외국인 자금이 국채보다 주식에 대거 몰려 있어 금리인상이 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론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론적으로 금리를 올리면 채권수익률이 상승해 외국인 자금이 밀려오기 마련이지만 인도 정부는 외국인의 인도 채권 보유 상한선을 정해 자금유입에 한계가 있다. 현재 외국인이 보유한 인도 채권 규모는 350억달러로 주식(2,500억달러)의 7분의1에 불과하다. 오히려 금리인상이 기업활동 위축 및 외국인 주식투매로 이어져 주가가 폭락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RBI의 루피 안정화대책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29일 로이터는 RBI 관계자를 인용해 시중은행이 국민들로부터 시가보다 비싸게 직접 금을 매입하는 방안이 곧 시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인도판 '금모으기운동'인 셈이다. 현재 인도 국민들이 보유한 금은 모두 3만1,000톤(1조4,00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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