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으라.’ 종교적 광기에 빠진 한 신부의 선동에 사람들이 낫과 쟁기를 내려 놓고 칼을 잡았다. 선동가의 이름은 은자 피에르(Pierre l'Ermite). 성지를 회복하라는 베드로의 계시를 받들자는 그의 선동에 넘어간 민중은 정확한 행선지도 모른 채 무리를 지어 무작정 동쪽으로 떠났다. 십자군전쟁이 이렇게 시작됐다. 피에르는 출생과 성장이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인물.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파병을 추진할 즈음 갑자기 나타나 민중을 부추긴 사람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조랑말을 타고 다니고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그는 타고난 연설 솜씨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가을로 잡혔던 십자군 출병이 봄으로 당겨진 것도 피에르의 선동 때문이다. 주로 농노와 어중이떠중이로 구성돼 ‘군중 십자군’으로 불렸던 피에르의 군대 4만여명은 열정으로 출발했으나 곧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물자와 식량이 부족했던 것. 피에르는 해결책을 약탈에서 찾았다. 가는 곳마다 세를 불리던 군중 십자군은 1096년 4월12일 독일 쾰른 지방에서 폭도로 돌변했다. 예수를 배반한 유대인을 색출한다며 강제로 식량과 물자를 빼앗는 십자군에 영주들도 속만 앓았을 뿐이다. 약탈에 맛들인 군중 십자군은 헝가리에서 같은 기독교도 4,000여명을 학살하며 원성도 샀다. 동로마제국은 이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할 경우 후유증을 두려워하며 군수품과 선박을 내줬다. 만행 끝에 예루살렘에 당도한 군중 십자군의 결말은 처절한 패배. 유일한 기사였던 레이날드는 항복한 뒤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피에르 자신도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은혜와 축복 대신 증오와 복수를 심은 은자 피에르의 악령은 죽지 않았다. 기독교와 이슬람 간 갈등구조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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