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오동 천년, 탄금 60년' 펴낸 가야금 명인 황병기 둥두둥 두둥~ 오묘한 소리에 빠져 60년간 매일 가야금 탔다 강동효 기자 kdhyo@sed.co.kr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반세기 넘도록 가야금을 연주해 온 명인 황병기(73)의 집은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새하얗다. 서울 북아현동 구릉에 자리잡은 이 집에서 그는 35년째 살고 있다. 1층은 소설가인 아내 한말숙씨가 사용하고 2층은 그의 작업 공간이다. 고즈넉한 2층의 확 트인 창으로는 마포와 여의도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집안 곳곳에 가야금이 뉘어져 있었다. 응접실과 연결된 그의 연습실은 몇 해 전 첼리스트 장한나가 가야금을 배웠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책 '오동 천년, 탄금 60년'(랜던하우스 펴냄)을 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어린시절 일화와 명사와의 조우(遭遇)가 담겨 있어 흥미롭다. 연도를 비롯해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는 게 놀라웠다. "일기를 쓰거나 특별히 메모한 건 아니야. 그 만큼 그 사건들이 내 머릿속에 확 박혀 떠나질 않았던 거지." 연대기순으로 배열된 책의 앞 부분에는 황씨가 가야금을 배우게 된 계기와 괴짜 학생시절이 담겨 있다. 그가 가야금을 처음 접한 건 6ㆍ25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친구인 성화의 제안으로 등굣길에 늘 장구 소리가 흘러 나왔던 '고전무용 연구소'의 문을 두드린다. "가야금 좀 배우러 왔다"고 하니 가야금을 가르치던 김철옥 씨는 기특하다며 크게 반겼다. 그는 "소리가 '둥둥' 뜨는 게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야금 소리에 반했던 그는 피란 중에 가야금을 사달라고 어머니를 조른다. 그러길 서너 달. 어머니는 "부산에서는 가야금을 구할 수 없고, 전주가 예향(藝鄕)이니 그리로 가겠다"며 전주에서 가야금을 구해 부산으로 돌아온다. 황씨는 이후 연주하는 손을 다칠까 걱정돼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던 유도를 그만 둘 정도로 가야금에 빠져 살았다. "가야금 켜는 건 매일 세수하고 이 닦는 것 같은 내 일과였어. 음악가가 되겠다는 목표와 사명감도 없었는데 연주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매일 한 거지." 유년의 기억·명사와의 만남 등 생생한 기록 …지금도 1년에 연주 50회 소화 그는 부산 국립국악원을 내 집 드나들 듯 다니며 여러 명인들에게 전수를 받는다. 조선시대 평민들이 즐겼던 음악 '산조'도 처음 접했다. 그 소리가 오묘하고 정겨워 그를 가르쳤던 정악(正樂) 악사 김영윤 씨에게 가르쳐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정악사에게 민속악을 가르쳐 달랬으니 얼마나 우스웠겠어? 김영윤 선생이 나는 못 가르치니 아까 장구 치던 사람에게 배워라 하더라고." 당시 장구 치던 이가 황씨의 음악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김윤덕 씨다. 산조는 악보가 없는 음악이다. 입으로 전해주고 마음으로 받는 이른바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내려온다. 정악과는 연주 방식도 다르다. 정악 연주는 가야금 줄을 옆으로 밀어 단단한 소리를 내는 반면 산조 같은 민속악은 줄을 위로 뜯어서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황씨는 전혀 다른 방식의 두 가지 음악을 동시에 배웠다. 하굣길에 산조를 배우고 다시 국립국악원으로 달려가 정악을 연주했다. 그가 고등학생 시절인 1954년 전국 국악 콩쿠르에 우승하게 된 것도 이런 노력 덕분이었다. 직업 음악인의 꿈이 없었던 그는 1955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는 학교에서 유명한 괴짜였다. 짚신을 신고 고등학생 시절 입던 교복을 대학에서도 입고 다녔다. "난 어떤 틀 속에 갇히는 게 싫더라고. 몸에 아직 잘 맞는 옷이 버젓이 있는데 뭣하러 새 옷을 사서 남들하고 똑 같은 모습으로 다니냐고 생각했지." 그의 자유로운 사고는 요즘도 변하지 않았다. 지난 2001년 27년 동안 몸 담았던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2002년부터 연세대 특별초빙교수로 '한국 전통음악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을 가르친다. 이 강의는 수강신청이 몰릴 정도로 인기다. "인생의 최고 절정기가 대학 시절이야. 음악도 그렇고 강의란 것도 그렇고 즐겁고 흐뭇해야지 어디 밖에서 써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거든. 난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거야." 그는 시험을 보기 전 학생들에게 A4용지 4분의 1크기의 '커닝 페이퍼'를 만들어 오라고 주문한다. 꼭 외우지 않아도 될 잡다한 내용은 거기다 옮겨 놓고 시험을 보라는 거다. 그는 "학생들의 불필요한 암기를 줄이고 시험 볼 때 불안감도 없애주고 커닝 페이퍼를 만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그 내용을 인지하게 되니 일석삼조"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직업 음악인의 길을 걸을 생각이 없었다. 1959년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이었던 작곡가 현제명 씨가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신설할 예정"이라며 가야금을 지도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차갑게 내치기 어려워 꼭 4년만 일할 작정으로 강사직을 수락했다. 이 때 배출된 서울대 국악과 1회 졸업생인 그의 제자가 오늘날 국악계 거목으로 인정 받는 이재숙, 김정자 씨 등이다. 4년 만에 서울대를 그만 둔 뒤 그는 영화사, 출판사를 운영하며 사업가의 길로 잠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1974년 신설된 이화여대 음대 국악과 교수직을 수락하며 직업 음악인이 됐다. 이대 재직 시절 작곡한 '침향무'는 유럽 순회 공연 내내 기립 박수를 받을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이후 '비단길', '미궁' 등 불멸의 명작을 차례로 내놓으며 전통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 자리잡게 됐다. 이 중 '미궁'은 작곡된 지 3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음악이 유행한 게 아니라 인터넷 괴담 때문이었다. '미궁을 세 번 이상 들으면 죽는다. 이미 죽은 사람만 전세계에 300명이 넘는다'는 괴소문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됐다. 결국 황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미궁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라는 글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했다. "내 음악 중에 일반인들에게 제일 많이 알려진 게 '미궁'이 됐어. 그런데 내 음반 중에 가장 안 팔리는 게 또 '미궁'이거든." 1999년 대장암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건강하다. 1년에 크고 작은 연주를 50여 회 이상 거뜬히 소화해 내고 새 일범 '달하 노피곰'(2008)을 내놓기도 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얼마 전 인간 형상의 로봇 '안드로이드'와 세계 최초로 협연을 하기도 했다. "체력 관리는 마을 뒷산 다니는 게 전부지. 그래도 아직 멀쩡하잖아." 칠순을 넘긴 가야금 명인은 오늘도 밤 11시면 어김 없이 가야금을 잡는다. 둥두둥 두둥…그 소리가 참 맑고도 청아하다. ▶▶▶ 관련기사 ◀◀◀ ▶ [리빙 앤 조이] 인생극장, 2막은 내가 주인공 ▶ [리빙 앤 조이] IMF를 정면돌파 한 힘! ▶ [리빙 앤 조이] '오동 천년, 탄금 60년' 펴낸 가야금 명인 황병기 ▶ [리빙 앤 조이] 황병기의 친구들 ▶ [리빙 앤 조이] 고혈압 환자 10명 중 2명 발병 ▶ [리빙 앤 조이] 건강신간 ▶ [리빙앤조이] 아빠, 낚시 같이가요! ▶ [리빙앤조이] Tip 이것만 알면 나도 강태공 ▶ [리빙 앤 조이] "기른 정, 동물도 마찬가지죠"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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