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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명을 수용하는 강의실이 빈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꽉 찼다. 법대 3ㆍ4학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강의시간이다. 이승호(50) 건국대 법학과 교수는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칠판에 큰 표를 그린 뒤 수사기관의 강제수사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75분 강의는 밀도가 높았다. 마치 고시학원에 와 있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tension)이 흘렀다. 송다슬(법학과3)양은 "교수님이 강의준비를 열심히 하시기 때문에 75분 수업이 매우 알차다"면서 "강의 시간마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올 1학기에 학부생을 대상으로 형사소송법을, 로스쿨에서는 형사법을 가르친다. 그의 강의는 법대에서 가장 먼저 마감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우수강의 평가 교수로 뽑힌 그는 2008년에는 가장 강의를 잘하는 교수에게 주는 '교육상'을 수상했다. 이 교수는 "좋은 강의 평가는 위로가 되지만 남우세스럽고 동료 교수들에게 미안하다"면서 "내 강의는 전통적인 방식이어서 화려하지도 않고 내세울 것도 없다"고 겸손해했다. ◇'쉽고 힘 있는' 수업 위해 철저한 준비=이 교수의 열강은 철저한 강의준비에서 비롯된다. 그는 강의 전날 수업 시간에 가르칠 내용을 A4 용지 3~4장 정도로 요약한 뒤 강의가 있는 날 아침에는 이 요약 내용을 '달달' 외운다. 칠판에 판서하는 내용도 요약본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요약본은 이 교수의 강의 노트인 셈이다. "강의는 강단에서 하는 연기입니다. 연기를 하려면 대본이 있어야죠. 칠판에 판서할 내용이 제게는 대본인 셈입니다. 연기자가 대본을 외우듯이 교수도 강의 내용에 완전히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의가 있는 날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의에만 집중합니다." 이 교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이해가 잘된다''재미있다'고 말한다. 김연주(법학과3)양은 "이 교수님은 어려운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고 말했다. 김혜연(법학과3)양은 "우스갯소리와 농담을 거의 하지 않지만 강의가 재미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도 어려운 법률지식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그의 강의철학은 '쉽고 힘 있는 수업'이다. 전문적인 지식을 교과서에 나와 있는 전문 용어로 설명하면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이고 쉬운 용어로 설명한 뒤 전문적인 용어로 마무리 짓는다. 또 수업이 늘어지지 않고 적당한 템포를 유지하려 애쓴다. 수업마다 강의할 내용을 2~3꼭지로 설정하고 학생들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도록 몰아간다. 수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긴장감이 높아지면 중간에 끊고 5분가량 잡담을 한다. 잡담도 즉흥적인 내용이 아니라 수업 전에 미리 생각해둔 것을 전한다. 이날도 이 교수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소개하면서 행복과 불행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수업 내용도 어려운데 잡담도 너무 무겁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요즘 등록금이 비싸다고 아우성치는데 내 강의 듣는 학생들로부터 비싼 등록금 낼 만하다는 얘기를 들어야 할 것 아니냐"면서 "쓸데 없는 잡담을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라고 말했다. ◇신림동 학원강사도 인정하는 '고수'=가르칠 내용이 많다 보니 형사소송법 강의는 '일방향식 수업'이 될 수밖에 없다. 토론식 수업이나 질의 응답을 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활용하는 것이 인터넷 카페다. 학생들이 질문을 올리면 이 교수가 답변을 해주고 여기에 학생들이 다시 댓글을 단다. 사이버상에서 자연스레 토론이 이뤄지는 셈이다. "수업 시간에 나오는 질문 중에는 불필요하거나 일부 학생들에게는 시간낭비일 뿐인 것이 많습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이러한 점이 자연스레 해결되죠." 이 교수는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문답식 강의는 강사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인터넷의 도움을 받는다"면서 "소크라테스도 지금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면 인터넷 카페를 이용할 것 같다"며 껄껄 웃었다. 형사소송법은 법학과 학생들의 전공 수업이면서 사법시험 등 국가고시와 관련이 있다 보니 최신 시험경향을 짚어주는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들은 이 교수가 신림동 고시학원 강사들도 인정하는 '고수'라고 추켜세운다. 이 교수도 가끔 신림동 학원 강사들의 동영상을 보면서 강의에 참고한다. 그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뭘 원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 점을 충족시켜줘야 한다"면서 "학생들이 국가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나에 대한 진정한 강의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학 분야는 사교육이 활성화돼 있기 때문에 대학 강의가 부실하면 학생들이 학원 가서 들어야 합니다. 일부 교수들은 시험경향 등을 소개하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학생들이 원하면 충족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똑같은 것을 가르치더라도 학원 강사처럼 외워서 나열하기보다는 이해를 시켜주는 것이 교수가 할 일이죠." 이 교수는 "과거에는 행형제도와 수형자의 인권문제를 주로 연구했지만 최근 들어 범죄 피해자 보호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개인적으로 빅토르 위고를 좋아하는데 언젠가 '레미제라블'을 텍스트 삼아 도덕과 종교, 범죄와 형벌에 대해 토론하는 교양강의를 개설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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