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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공자의 학문인 유가(儒家)는 제로지역(齊魯: 춘추전국시대의 산둥성을 일컫는 말)의 '지방지식'(local knowledge)에 불과했다.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하던 춘추말 전국시기 가장 득세했던 학문은 오히려 법가나 당시 외교로 이름을 떨쳤던 종횡가(縱橫家)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학문이 법가나 종횡가를 압도하고 후대 중국인들의 사유를 거의 독점하게 된 원인은 난세를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치세를 추구하는 학문이고,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본질적 가치인 인의(仁義)를 우선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유가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학문 즉, 인간학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가의 내포는 지극히 방대하여 내부적으로 서로 상치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는 오늘날의 유가가 기나긴 역사와 시대의 반영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초기 유학을 흔히 공맹(孔孟)사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공자와 그를 숭상했던 맹자의 사상에는 이미 본질적인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컨대 공자가 제시한 '삼강(三綱)'은 계급적 차이와 이를 기초로 한 질서를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해 맹자가 제시한 '오륜(五倫)'은 이런 계급적 구별보다 인성의 보편적인 화해와 인권을 강조하고 있다. 그 뒤로 각 시대마다 수많은 학자들이 공맹 사상의 적용과 해석에 대한 무수한 의견과 주장을 내놓았고, 송대 사상가 주희(朱熹)에 이르러서는 유가에 속한 모든 학설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집대성되면서 이른바 '신유가'라 불리게 된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전통 유가의 도덕규범보다 모든 인간이 천부적으로 갖고 있는 순수한 인식기능인 '양지(良知)'를 중시하는 이른바 양명학이 대두하면서 그의 학문을 극도로 진보적인 경향으로 몰고 가 중국 최초의 사상범으로 기록된 이지(李贄)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동심설(童心說)'을 주장하여 공맹의 도리를 부정하기도 했다. 이쯤에서 유가의 내포에는 이미 상호 모순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에 유가 사상은 중국의 거의 모든 조대에 걸쳐 국가 이데올로기로 숭상되면서 중국인들의 의식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내포와 외연이 끝없이 확대되면서 중국문화의 블랙홀이 된 유가의 사유가 놀랍게도 오늘날 '문명의 충돌'로 표현되는 세계화 시대의 국제관계 및 인간관계에 참신한 소통의 기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는 유가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가치가 '충돌'이 아닌 공존, 더 나아가 조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건강한 상호작용과 인류와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 인심(人心)과 천도(天道)의 보완적 관계 등 유가가 지향하는 동아시아적 가치들이 세계와 지역, 집단과 개인의 충돌은 물론, 사회와 조직 내부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건강하고 생산적인 지혜와 윤리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가 인간학의 요체이자 수천 년의 시공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이 땅에서 공자가 빛나는 이유일 것이다. 책은 중국인이 왜 지략에 강한지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유가의 근본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 설명해 현실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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