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결은 '선박왕' 권혁(62) 시도상선 회장 사건, '구리왕' 차용규씨 사건 등 최근 큰 이슈가 됐던 굵직한 역외탈세 사건 가운데 나온 첫 판결이어서 현재 재판 중인 선박왕 등 비슷한 사건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표는 지난 1996년 한화 8,000만원을 종잣돈 삼아 동생과 함께 홍콩에 '군도 HK'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미화 10만달러였던 이 종잣돈은 박 대표 형제가 각 25%씩, 박 대표가 운영하던 법인이 50%를 충당했다.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인형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수년 만에 미국과 홍콩ㆍ한국을 오가며 사업에 몰두했던 박 대표는 1,000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몇 년 후 돋보이는 성과가 오히려 사업가의 발목을 잡았다. 국세청은 국내에 머문 기간이 300일을 웃도는데도 미국 영주권이 있었다는 이유로 박 대표에게 437억원의 포탈세금을 포함해 2,140억여원의 세금을 추징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김시철 부장판사)는 박 대표를 1997년부터 2000년까지 국내거주자가 아니라고 봤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가 당시 해외에서 벌어들인 원천소득에 대해 종합소득세를 낼 의무는 없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한미조세협약은 한국과 미국에 모두 거주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주거(permanent home)'가 있는 국가의 거주자로 간주한다"며 "199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 1997년 영주권을 취득한 박 대표는 한국에 머문 기간이 상당했더라도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표의 부인이 1993년부터 1999년까지 단 한번도 국내에 체류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었다. 검찰은 '박 대표가 아이들 교육ㆍ군대 문제로 일시적으로 이주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기각됐다.
박 대표가 설립한 버진아일랜드의 특수목적법인(SPC)회사의 경우 재판부는 차명계좌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재판부는 "1인 회사 명의의 계좌가 곧바로 1인 주주의 차명계좌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회사설립 목적 또한 국내 세금 포탈보다는 홍콩 법인세 경감ㆍ투자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박 대표가 조세피난처에 회사를 세운 것도 국내 과세관청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조세회피 목적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은닉 의도가 드러나는 거래 정황 등 특별한 사정이 추가로 증명돼야 한다"면서 "우리나라는 현재 홍콩과 버진아일랜드 모두와 조세협약이 체결돼 있지 않기 때문에 박 대표의 입장에서는 홍콩에 예치하는 것이나 버진아일랜드에 송금하는 경우나 실질적 차이가 없다"며 재산도피 혐의를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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