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고구려의 옛 도읍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안(集安)에서 고구려비가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으로 우리 학계가 흥분하고 있다. 이 '지안 신고구려비'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비석은 지난해 7월 현지 주민이 지안시 서쪽 마센하(麻線河) 다리 아래에서 발견한 것으로 광개토태왕비(6.39m)의 4분의1 정도인 높이 1.7m 크기다. 태왕비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4면비인 데 비해 이 비석은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은 양면비로 전면에 10행 218자가 새겨져 있고 판독 가능한 문자는 140여자 정도이다.
학계가 주목한 이유는 비문의 일부가 태왕비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문의 첫머리는 대체로 '하늘의 뜻을 헌양하고 스스로 천왕을 계승하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열었도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신의 가호로 나라를 열고 강토를 개척했으며(開國闢土) 장자로 후사를 이어 대대로 계승했다(繼胤相承)'고 해석된다. '추모왕이 나라를 열었다'는 표현은 태왕비문과 일치한다.
이후의 비문은 대부분 제사와 수묘 법령과 묘지기에 대한 기사로 구성돼 있다. 신고구려비가 관심을 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태왕비문에 묘지기의 착오를 막기 위해 '조선왕(祖先王)의 능묘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동안 발견된 예가 없어 이것이 광개토태왕이 선대왕들을 위해 세운 비가 아닐까 하는 점에서였다. 특히 '비를 세워 묘지기 우두머리(烟戶頭) 20인의 인명을 명기해 후세에 전하며 묘지기는 사고팔지 못하고 부자라도 살 수 없도록 하며 이를 어긴 자는 벌한다.'는 표현의 후반부는 태왕비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같다.
신고구려비의 내용은 태왕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위조품이 아니라면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더불어 당대 사료가 희소한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비를 조사한 중국 학자들이나 이를 접한 우리 학계 대부분도 광개토태왕대에 세워진 비로 보고 있으나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 비석의 형태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태왕비와는 달리 중국의 비석과 비슷하다. 이를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다가 독자의 형식으로 발전했다고 보기도 하나 오히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태왕비에서 비면을 다듬은 중원고구려비를 거쳐 보다 정형화화 된 신고구려비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태왕비문의 건국신화가 사실 위주의 소박한 문체로 돼 있는 데 비해 신고구려비는 보다 정형화된 한어 고문체를 사용한다. 특히 태왕비에는 '추모왕의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母河伯女郞)'으로 표현했는데 신고구려비에는 '하백의 손(河伯之孫)'으로 재해석돼 있어 태왕비가 원형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신고구려비는 광개토태왕대보다 후대에 건립됐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신고구려비는 고구려 독자의 표현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추모왕의 건국을 태왕비와 같이 '창기(創基)'로 표현하는 동시에 '개국(開國)'이라는 용어도 사용하는데 고대사회에서 개국은 주로 제후국의 건국을 의미하는 용어다. 이러한 점은 비석의 진위를 의심스럽게 하며 보다 신중한 연구가 요망된다.
신고구려비는 제사와 수묘 제도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 보이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점도 갖고 있다. 신고구려비가 당대 사료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비석의 실물이 공개되고 한중 양국 학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보다 객관적인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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