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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았고, 먼 길을 돌아 제자리를 찾았다. 보통 사람들이 반짝 단거리를 뛰고 성공한 이들이 장거리 선수로 산다면, 그는 마라토너다. 현역 최고령 화가 김병기(98·사진)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직무대리 윤남순) 과천관에서 2일부터 열리는 김병기의 대규모 회고전 '김병기:감각의 분할'에 맞춰 작가가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섰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6·25전쟁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를 지나 한국의 근대화와 현대미술의 변천사를 온몸으로 지켜봐 온 그는 여전히 당당했고 눈빛은 강렬했다.
평양 출신인 김병기의 부친은 고희동·김관호에 이은 한국에서 세 번째로 서양화를 배워온 화가 김찬영(1893~1960)이다. 평양의 신식 문명과 전통적 풍류를 동시에 누리며 자란 그는 일본으로 유학했고 초현실주의·추상미술 등 1930년대 신흥미술을 흡수했다. 세 살 위의 김환기와 동갑내기 이중섭·유영국이 그림 친구였다. 귀국해서는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도 지냈지만 한국전쟁 직전인 1948년 월남해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과 종군화가 부단장을 역임하는 등 행동하는 예술가로 험난한 시절을 견뎠다. 서울예고 설립당시 미술과장을 지내고 서울대 강사 등을 맡으며 한국 미술교육의 토대도 다졌다. 최만린·정상화·임충섭·조평휘 등 쟁쟁한 원로화가가 모두 그의 제자다.
1953년 부산 피난지 남포동 다방에서 비평글 '피카소와의 결별'을 발표하는 등 이후 김병기는 동시대 현대미술의 전개를 주제로 글을 쓰는 이론가로 두각을 드러냈다. 1964년에는 한국미술협회 3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경력의 최절정이던 이듬해, 그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 겸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후 돌연 잠적했다. 바쁘게 활동하며 짬짬이 그림을 그리던 그가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가족이 있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뉴욕의 사라토가에 머무르며 원없이 작업했다. 그리고는 22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70세이던 1986년 그해 가나아트에서 귀국 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때부터 가장 열정적인 인생의 전성기를 살고 있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는 최근 10년의 미공개 신작을 포함해 회화 70여점과 드로잉 30여점을 선보였다. 그는 서울과 평양, 뉴욕과 도쿄 등 자신이 머물렀던 곳의 풍광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그 위에 자를 대 선을 긋는다. 제도사로 일했던 경험이 자를 이용하게 했다.
작가는 "내 그림은 추상적 화면에 자로 그은 건축적 선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전시는 감상과 감동을 넘어 인생의 교훈을 묵직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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