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후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내부 보고서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장악하기 위해 미국 금융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등장한 빌 클린턴 행정부는 뉴욕 금융가를 앞세워 각국에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한국이 1995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며 자본 시장을 자유화한 것도 미국의 글로벌 전략을 수용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던 미국이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금융기관이 부실에 허덕이자, 외국 자본에 규제를 가하고 있다. 미국이 앞장서자 유럽과 일본이 따라가며, 선진국들이 경쟁적으로 투자 장벽을 쌓고 있다. 이른바 투자보호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그 이면에 고유가로 엄청난 오일머니를 축적한 중동과 고도 경제성장을 통해 수조 달러의 외환을 벌어들인 중국의 자본이 국제금융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하면서 선진국 기업을 사들이자, 자유주의 기치를 내걸었던 선진국들이 몸을 웅크리며 투자 장벽을 쌓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역으로 외국인직접투자(FDI)에 의문을 표시하며 문을 걸어 잠그면서 세계에 새로운 경제 내셔널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선진국들이 중동과 아시아계 자본 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으로부터의 투자에도 난색을 표하는 등 선진국에서 전방위적인 투자보호주의가 노골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선진국들은 국부펀드를 중심으로 해외투자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국가 경제의 중추가 되는 기간산업에 대한 해외투자를 제한하고 있다. 2년 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국영 항만업체인 두바이포트월드(DPW)가 미국 컨테이너 터미널과 항만시설을 인수하려다 미 의회의 반대로 좌절된 바 있다. 이에 대해 월스리트 저널(WSJ)은 "미국에서 정부규제가 없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며 "규제를 강화할 지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강화할 지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내 외국인 투자 여건이 까다로워지고 있다. 미 재무부 산하 대외투자위원회(CFIUS)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민감한 분야의 자국 기업 매각을 철저히 조사하고, 의회도 정치적 이유로 M&A계약에 대해 딴지를 거는 일이 잦아 졌다. 올 초 CFIUS는 중국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華爲)그룹이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과 공동으로 미 통신보안업체인 쓰리콤을 인수하려고 시도하다가 무산된 것도 마찬가지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버락 오바마 등 유력 후보들이 자유 무역의 폐해를 주장하는 것도 미국의 까다로운 투자제한을 대변한다. 지난 2005년 중국해양석유총공사가 미국 석유회사 유노칼을 인수하려 했을 때 워싱턴의 정치권은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법률회사 오멜베니앤마이어스의 시오도르 카싱어 변호사는 "예측하기 어렵고 변덕스러운 의회 내 정치적 환경이 CFIUS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도 최근 캐나다 연금펀드가 오클랜드 공항을 매입하려는 시도를 막았고, 캐나다 역시 미국 업체가 자국 방위산업체인 맥도널드데트와일러를 인수하지 못하도록 했다. 칼 소밴트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최근 FDI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뚜렷하다"며 "최근 3년간 만들어진 FDI 관련 법안 가운데 30~40%는 투자에 대한 개방과는 거리가 먼 규제 방안"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전력 회사 J-파워의 지분을 늘리려던 영국계 헤지펀드 차일드투자펀드의 시도가 일본 정부의 반대로 실패했다. WSJ는 최근 들어 외국계 펀드의 M&A시도에 대항하기 위해 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책을 도입하는 일본 기업들이 늘어 전체 상장사의 16%인 634개사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M&A가 발생할 경우 기존 경영진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주도록 해 M&A가 어렵도록 하는 제도다. 최근엔 나리타 공항의 상장을 앞두고 외국인의 보유 비중을 제한할 지를 놓고 격론이 한창이다. 이 논란은 호주의 맥커리은행이 하네다 공항을 운영하는 업체의 지분 20%를 인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투자 규제를 정당화하는 측에서는 규제가 에너지ㆍ보안 등 국가 안보에 중요한 특정산업에 국한된 만큼 큰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그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컨설팅업체인 OCO글로벌의 마크 오코넬 최고경영자(CEO)는 "자국 산업 보호의 기준처럼 돼 버린 '국가안보'의 정의가 너무 다양해 국가간에 혼선과 의심이 발행한다"며 "일부 국가들은 자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구실로 국가 안보를 들먹거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발 금융위기를 해소하는 과정에 미국 씨티그룹이 아부다비투자청으로부터 75억달러를 수혈 받은 것으로 비롯, 서구 은행들이 중동과 중국에 구제 자금을 얻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아쉬을 땐 손을 내밀면서도 중동 자금이 테러 세력과 연계돼 있는게 아닌지 하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소밴트 교수는 "선진국들이 FDI에 대해 색안경을 끼기 시작하면서 아시아ㆍ남미 등 이머징 국가에게 보호주의 명분을 줄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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