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끊기던 스페이스9, 테마 갖춘 쇼핑공간으로 바꾸자
방문 고객 3배로 늘어나고 머무는 시간도 길어져 활기
"8년 전 함께 울었던 직원들과 진정한 용산시대 준비"
지난 1984년 6월. 아직 무더위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대형 아파트단지 건물 사잇길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는 청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청년은 아파트단지 내 슈퍼에서 쌀자루를 챙겨 주민에게 배달한 후 쌀값을 받아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현듯 조금 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돈만 건네던 아주머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사병 1만명의 식자재와 생필품을 책임지는 육군 보급 장교였다. '그만둘까'라는 생각이 청년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슈퍼로 돌아오자마자 선배의 호출에 또 다른 쌀자루를 자전거 짐칸에 실었다. 이 청년이 바로 양창훈(55·사진) 현대아이파크몰 대표다.
"현대그룹 공채로 들어와서 희망 계열사를 적으라길래 1순위, 2순위, 3순위까지 모두 금강개발(현 현대백화점)이라고 썼습니다. 동기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은 건설·자동차·중공업이었지만 저는 유통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 대표가 금강개발에 입사한 후 처음 배치된 곳은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단지 내 '금강수퍼'. 주어진 일은 자전거 배달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ROTC 출신 대졸자를 찾는 기업이 많았던 터라 사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6개월 지나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개점과 함께 백화점으로 재배치됐다. "돌이켜보니 어려운 곳에서 묵묵히 일하도록 한 것은 현대식 신입사원 교육이었다"는 게 양 대표의 말이다.
양 대표는 이 같은 경험 덕분에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만을 터뜨리기보다는 '묵묵히 견디면 이 또한 지나간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당연히 지난 8년 동안 현대아이파크몰을 정상화시켜 용산을 대표하는 복합쇼핑몰로 부활시키는 고난의 과정에서도 이 같은 신념은 커다란 힘이 됐다.
"2005년 최동주 전 대표의 러브콜을 받고 현대백화점에서 현대아이파크몰로 자리를 옮겼는데 한숨이 나오더군요. '현대' 브랜드만 있지 나머지는 바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지요."
양 대표는 오픈 초기 청계산 등반대회를 잊을 수 없다. 직원 화합을 위해 마련된 행사였지만 뒷풀이장은 직원들의 하소연장이 되더니 곧바로 울음바다가 됐다. 가을비까지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울먹이는 직원들을 다독이며 다 함께 성공하자는 말을 몇 번이고 건넸다.
현대아이파크몰의 전신은 2004년 문을 열었던 스페이스9이다. 철도청과 현대산업개발이 공동으로 설립한 현대민자역사의 작품이었다. 부동산시장 호황에 힘입어 100% 가까운 임대 분양률을 기록했지만 투자자들 대다수가 임대수익만 기대하고 들어온 장사 문외한이었다. 거액의 모델료를 주고 톱스타 서태지를 앞세우기도 했지만 손님몰이는 쉽지 않았고 매장 복도는 텅 비었다.
결국 현대산업개발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당시 쇼핑몰 분양시장은 부동산기획자가 분양을 마치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현대산업개발은 기획·개발·운영·관리를 모두 책임지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계약자들과 주주들의 동의가 필요했고 이들을 만나 새로운 방식의 쇼핑몰을 만들자고 일일이 설득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상무였던 양 대표다.
그는 최 전 대표와 함께 용사역사 집단상가를 살리기 위해 현대백화점 유통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공부했던 선진국형 복합몰을 도입하기로 했다. 백화점을 만들어 핵심 점포로 삼고 다양한 전문점과 여가시설을 갖춘 획기적 시설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양 대표는 "지금은 롯데·신세계 등 유통업체마다 복합몰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생소했다"며 "몰이란 단어에서 동대문 패션몰이나 인터넷몰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회상했다.
2006년 각고의 노력 끝에 스페이스9은 백화점을 갖춘 복합몰로 리모델링해 재오픈했지만 신생 유통채널을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과정 역시 매우 힘들었다. 직원들이 청계산 등반대회에서 연달아 울음을 터뜨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발로 뛰어도 유명 브랜드 유치가 힘들었습니다. 브랜드들이 아예 백화점 취급을 안 했어요. 마케팅 묘안을 아무리 짜내도 고객을 끌어들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느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현재 아이파크몰을 찾는 고객은 평일 27만명, 주말에는 두 배 이상 많은 60만명에 달한다. 2006년 개장 당시의 평일 9만명, 주말 17만명선과 비교하면 3배 수준이다. 수치도 크게 늘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길어진 방문객 체류시간이다.
양 대표는 2010년 최 전 대표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아이파크몰을 이끌게 된 후 '몰링' 개념 적용에 심혈을 기울였다. 백화점은 리빙관·문화관으로 꾸미고 전자상가 쪽도 단순히 박스식 점포가 줄줄이 나열된 공간이 아닌 테마가 있는 디지털 전문점으로 꾸몄다. 기존의 백화점과는 차별화된 쇼핑공간임을 소비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가구 매장을 국내 최대 규모로 구성했고 악기 전문점도 오카리나에서 플루트, 전자기타, 드럼, 그랜드피아노까지 모두 구입 가능한 대형 공간으로 만들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몰링'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곳이 아이파크몰입니다. 소비자가 단지 구매를 위해 들렀다가 금방 가버리는 곳이 아니라 보고 먹고 놀고 즐기는 공간을 지향했습니다."
양 대표의 설명대로 현대아이파크몰은 국내 1세대 복합몰로 꼽힌다. 이곳이 생기기 전에는 전자상가·패션상가 등 단일 카테고리의 상품만 취급하는 전문몰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이파크몰은 전자·패션·가구·악기·키덜트 등을 모두 품고 영화관·대형마트·식음료시설까지 겸비했다.
최근 유통업계에서 복합몰의 화룡점정으로 꼽는 엔터테인먼트시설도 일찌감치 마련했다. 중앙광장에 여름에는 워터파크를 설치하고 겨울에는 아이스링크를 조성했다. 옥상의 빈 공간을 이용해 어린이는 물론 성인도 이용 가능한 풋살경기장을 조성한 것도 눈에 띈다. 양 대표는 "아이파크몰 풋살경기장은 공 좀 찬다는 사람은 다 아는 '풋살 메카'"라며 "매달 5,000~6,000명이 도심 대형 건물 옥상에서 풋살을 즐긴다"고 설명했다.
이제 현대아이파크몰 개점 10주년까지 2년의 시간이 남았다. 양 대표와 직원들의 목표는 진정한 용산 시대의 명실상부한 대표 복합몰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8년 전엔 주변환경이 척박했습니다. 대형 철도역 인근이라 집창촌도 있었습니다. 그때보다 환경이 정비되고 주상복합건물과 아파트단지 등이 조금 늘긴 했지만 대형 상권이 되기엔 부족한 면이 여전히 많은 지역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용산이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양 대표의 얼굴이 밝아졌다. 용산 참사와 글로벌 금융위기, 서울시 뉴타운 구조조정 등의 영향으로 지연됐던 용산 재개발 프로젝트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이파크몰 주변에는 아파트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있고 오는 2017년에는 용산관광버스터미널 부지에 국내 최대 규모인 2,000객실 규모의 호텔도 완공된다. 스카이라인이 달라지고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북적대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상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현대아이파크몰을 찾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감출 수 없다.
양 대표는 "현대아이파크몰 직원들이 오픈 초기 텅 빈 매장을 보며 느꼈던 좌절감은 이제 즐거움으로 바뀌었고 그 즐거움은 조만간 다시 자부심으로 바뀔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인생의 진리"라고 강조했다.
●양창훈 대표는 △1959년 서울 △1977년 서울 동북고 △1982년 중앙대 경제학과 △1984년 현대그룹 공채 입사 △1997~2002년 한국유통경제포럼 부회장 △2005년 현대아이파크몰 영업본부장 △2010년~ 현대아이파크몰 대표 |
직원이 즐거워야 고객도 즐거워… 가족형 이벤트 늘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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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