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7월1일, 모로코 남서부 아가디르(Agadir) 항구. 독일제국의 전투함 ‘판테르’호가 항구에 들어섰다. 거함 건조경쟁이 한창이던 당시 위력만 따지자면 판테르호는 무시해도 좋을 만한 함정이었다. 무장이라야 105㎜ 함포 2문에 37㎜ 6문, 만재 배수량 1,193톤에 불과한 포함이었으니까. 술탄에 반대하는 유목민들의 반란을 맞아 독일인 보호를 명분으로 모로코에 나타난 판테르호는 국제적 긴장을 낳았다. 모로코를 사실상 지배하는 프랑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독일이 모로코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갈등을 일으켰던 1906년의 상황을 떠올리며 판테르호의 진입을 ‘2차 모로코 위기’로 몰아붙였다. 사태의 결말은 프랑스의 완승. 프랑스와 동맹관계였던 영국이 독일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며 지브롤터에 주둔하던 지중해 함대를 급파하는 한편 외교적 중재에 나서는 강온 양면책을 펼치자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할양 받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동의하고 말았다. 문제는 후폭풍. 전쟁까지 각오했던 열강은 군비증강에 열을 올렸다. 유럽에 감도는 전운은 본격적인 석유시대의 개막을 앞당겼다. 강력한 대독일 정책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해군장관에 취임한 윈스턴 처칠은 단시일에 해군력을 끌어올릴 방편으로 쟁점이었던 전함 연료의 석유전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처칠과 영국은 주요 전함의 연료를 석유로 바꾸며 원유의 안정적 공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중동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석유회사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세계 원유시장의 큰 손인 영국석유(BP)도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아가디르 사건은 1차대전뿐 아니라 본격적인 석유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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