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갖게 되는 이런저런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분위기에 딱 맞는 건배사다. 건배사가 어떠했느냐에 따라 모임의 성패가 갈린다 할 정도로 건배사는 중요하다. 필자가 은행장으로 있을 때는 두 분의 CTO(Chief Toast Officer)를 두기도 했다. 말하자면 건배 전문 임원이다. 공식적 행사나 회식이 있을 때마다 건배 선두주자로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고 그날 모임의 주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훌륭한 건배사가 나날이 쌓여갔다. 급기야 한 권의 책으로 건배사 모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건배를 지명받은 한 임원이 대뜸 "건배사 없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바람에 모두 박장대소를 터뜨린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내가 외친 건배사 중에서 지금도 후배들에게 회자되는 영어 건배사가 있다. 본점 식당에서 PB 수백 명과 함께 회식하게 된 자리에서 갑자기 건배사를 하게 됐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어로도 건배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자, 건배 제의를 하겠습니다. 원샷(One Shot)!" 장내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건배사도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좋아한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한다는 의미도 있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을 잘하자는 다짐일 것이다. 얼마나 긍정적인 메시지인가. 송구영신은 영시(英詩)에서도 볼 수 있다. 19세기 영국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링 아웃, 와일드 벨스(Ring Out, Wild Bells)'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Ring out the old, ring in the new, (묵은해는 울려보내고, 새해를 울려들여라)
Ring out the false, ring in the true. (거짓을 울려보내고, 진실을 울려들여라)
우리 선조들이 읊던 송구영신과 흡사하지 않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마음가짐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 옛것, 거짓은 종소리에 묻어 날려보내고 새것과 진실은 종소리와 함께 우리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자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해본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사대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33번 타종했다고 한다. 광복 후로는 서울시장이 각계 인사와 함께 제야의 종을 33번 울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에서 33천을 도리천이라고 하는데 그곳 사람들은 무병장수한다고 해 33번 타종한다고 한다. 해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다. 묵은 때를 씻고 새 맘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의지야말로 우리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최고의 건배사 송구영신! 비록 그것이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계속되는 다짐과 각오는 우리를 분명 변화시킬 것이다.
'Ring out the old, Ring in the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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