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만큼 애타고 절박한 게 없다. 삶의 무게에 눌려 반지하 단칸방에서 동반자살한 세 모녀가 남긴 편지에 가슴이 아린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5만원권 14장이 담긴 봉투에 적힌 짧은 언어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고운 심성과 최소한의 자존심이 느껴진다. 떠나는 이들은 연신 '죄송하다'고 했지만 정작 미안해야 마땅한 것은 우리들이다.
△죽음이 엄습하면 사람은 절망에 빠지기 십상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1905년)'에서 중병에 걸린 젊은 여류화가 지망생이 그랬다. 초겨울 나뭇잎을 세며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혹한에도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를 보고 희망을 얻어 다시금 살아났다. 아무도 모르게 담벼락에 페인트로 밤새 잎사귀를 그린 노화가는 비바람과 추위에 노출돼 끝내 폐렴이 도져 생명을 잃었지만 한 사람을 살렸다. 정말로 절망이 희망의 다른 얼굴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서울하고도 강남 땅에서 일어난 세 모녀의 죽음은 국민소득 4만달러와 국민행복시대를 꿈꾼다는 우리들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세 모녀와 반대로 더러운 마지막도 적지 않다. 온갖 해악을 저지르고도 일신의 안위만 영위하고자 추한 모습만 보이다 잃을 것 다 잃은 뒤에야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군상이 주변에 어디 하나둘인가.
△소설 속의 마지막 잎새와 세 모녀가 남긴 마지막 집세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과 절망 속의 죽음은 서로 다르지만 삶의 마지막 행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시인 릴케는 '엄숙한 시간'에서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읊었다. 약자를 외면하고 따돌렸던 우리가 반성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는 노력을 펼친다면 세 모녀의 마지막 집세는 노화가의 마지막 잎새처럼 누군가를 살려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변할 수 있으리라. /권홍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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