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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Life] 전성우 간송문화재단 이사장

"아버지 간송은 한국의 구겐하임… 문화 독립운동에 평생 바치셨죠"



일제 탄압에 맞서 민족 얼 지키려 훈민정음·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문화재 수집에 100만석 사재 털어

첨단 시대일수록 전통 문화 중요 내가 보물 지키는 창고지기였다면 다음세대는 발전시켜 널리 알려야

더 많은 국민이 보고 느낄 수 있게 DDP서 처음으로 대규모 외부전시


아버지는 문화를 구했고, 아들은 그 문화를 지켰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얼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전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사 모은 간송(澗訟) 전형필(1906~1962) 선생. 그의 아들 전성우(80·사진) 간송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그 문화재를 보존하며 연구를 지원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스스로를 '창고지기'라 낮춰 말하는 전 이사장을 26일 성북동 자택에서 만났다.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다며 외부 노출을 꺼리던 '보물지기' 전 이사장이 언론 인터뷰에 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보화각 위쪽,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 너머에 자리잡은 이 집 또한 명품이다. 우리나라 1세대 서양건축가인 김중업과 제자들이 설계한 것으로 '주한 프랑스 대사관'과 함께 김중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기와집을 닮은 곡선형의 지붕은 하늘을 담은 듯하고, 전날 핀 청매(靑梅)향이 은은하게 집을 감쌌다. 문화의 향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곳에서 전 이사장이 기자를 맞았다.

◇간송은 문화적 독립운동가=어느덧 생전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백발의 아들. 그 아들은 아버지 간송을 "항상 겸손한 선비셨다"라며 "우리와는 즐겁게 잘 놀아주는 분이셨지만 외부 활동에 대해서는 과묵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송이 문화재를 수집하던 시기는 일제가 우리 말과 문화를 말살하려 독이 올랐던 때였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일종의 '문화 독립운동'으로 일제의 표적이 될 정도로 위험천만했다. 그래서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의 경우 전 이사장은 부친의 소장 사실을 한동안 전혀 몰랐다.

"저희가 어리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우리말도 못 쓰게 하는데 훈민정음을 갖고 있다는 게 알려졌다가는…무슨 일이 생겼을지 상상할 수 있겠죠? 그래서 가족에게도 말씀 않고 지내셨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한글학회 분들이 집으로 찾아와 사진도 찍고 영인본(影印本·복제본)을 만드는 바람에 저도 그제서야 처음 훈민정음을 봤습니다."

간송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중추원 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와 와세대대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음악과 미술을 즐기며 야구부 활동을 할 정도로 운동도 좋아했다. 본래 문화적 애호가 깊었던 데다 귀국 후 위창 오세창 등과 교류하며 당대 지식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

"아버지 간송께서 택한 길이 바로 '문화적 독립운동'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심리적 폐허를 극복하고자 서구 각국이 힘을 기울였는데 예술을 통한 치유와 복원이 주요 방법론으로 대두됐죠. 프랑스에서는 명문가 로쉴드의 자제들이 예술품 수장으로 문화적 국권이 회복되길 바랐고 미국의 페기 구겐하임, 필립 존슨은 시대적 책무를 예술품에서 찾았습니다. 간송이 하신 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짓눌린 자존심과 강요된 열등감을 우리 역사·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극복하길 바라셨습니다."

1934년부터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한 간송은 취미적 골동 수집이 아닌 광복 이후 문화 정체성을 위해 물려받은 100만석지기 사재를 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 나이 스물아홉.

일본인 골동상을 포섭해 경매에서 도자기와 서화를 매입하게 했다. 일본으로 넘어갔던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그렇게 되찾아왔다. 당시 8칸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었는데 간송은 청자 값으로 2만원을 지불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서울 시내 아파트 스무 채 값이다. 입수 직후 또 다른 일본인이 '두 배를 줄 테니 팔라'고 했지만 간송은 "이보다 더 좋은 청자를 가져오면 내놓겠소"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간송은 문화재를 환수하고자 현해탄도 수차례 건넜다.

간송이 훈민정음을 소장한 것은 창씨개명령이 내려진 1940년 이후였다. 세종대왕이 직접 하사한 이 훈민정음을 팔고자 내놓은 사람이 1,000원을 달라고 했으나 간송은 "제값을 못 쳐주는 것도 안 될 일"이라며 1만원이나 더 얹어 1만1,000원의 거금으로 구입했다. 이처럼 어렵게 구하고 모은 문화재가 5,000여점(분류 기준에 따라 수치 변동)에 이르고 이 중 국보가 12점, 보물이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다.

◇"나는 간송의 유지를 받든 '창고지기'"=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간송은 부산 피난길에 '훈민정음'을 베갯속에 넣어 다녔다. 온갖 전쟁을 다 치른 전 이사장의 머릿속에는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제가 여섯 살일 때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이 중국과 싸우고는 미국·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더니 2차대전이 끝나자 또 6·25가 터지더군요. 저희는 피난 다니던 불안한 세대였습니다. 그러니 귀한 물건들이 상하거나 다치지 않게 지키고 정리하는 것이 제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아버님께서 문화재를 수집하신 대의, 그 유지를 받든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소장품 수천 점을 울산으로 옮기고 중공군 연합 침공이 재개되자 다시 유물을 부산으로 옮겼다. 일본인 적산가옥의 미곡창고에 널빤지만 바닥에 깐 채 그 귀중한 유물을 올려놓고 보호했다. 17세의 전 이사장은 다리도 아프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렇게 지켜냈다. 일각에서는 일 년에 딱 두 번 보름씩만 전시를 열고 연중 꼭꼭 문을 닫아두는 간송미술관을 두고 '은둔의 미술관'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그 시절을 버텨온 전 이사장과 그의 가족들은 보존이 급선무였다. 당연한 일이다.

사실 전 이사장은 화가이다. 어려서부터 위창 오세창, 춘곡 고희동, 청전 이상범, 삼불 김원룡, 혜곡 최순우, 황수영 등 문화계 인사들을 지켜보며 컸고 그림솜씨는 간송에게 물려받았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가 곧이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선례를 타파하는 미국적 미술을 배워 동양의 정신성과 서양의 기법을 접목했다. 미국 굴지의 갤러리와 전속 계약도 맺었고 순수 평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색동 만다라'라는 고유한 정신적 주제를 완성했다. 그는 미국 휘트니미술관이 기획한 '젊은 미국 미술 1960전'에 당당히 선발됐는데 동양인으로는 백남준보다도 앞선 '최초'였다. 그러나 그는 1962년 갑작스러운 간송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급히 귀국했다. 차남이었으나 형님이 요절한 탓에 큰아들 역할을 하며 그는 보화각을 살리는 데 매달렸다.

"아버님은 일제시대였기에 보화각을 개방하지 못하고 학자들에게만 문화재를 보여주셨죠. 간송의 뜻을 생각한 저는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 붙이고 일반 공개 전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저 보여만 드리는 것은 뜻이 없습니다. 문화재는 단순한 탐미의 대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매개체입니다.

지금 간송미술관은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아버님이 구하고 모으신 것을 저는 지키는 세대였다면 다음 세대는 이것을 발전시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미술관·박물관의 기능이 보여주는 전시뿐 아니라 보존·학술연구·교육 등이 있는데 그간 우리는 학술 연구소로서의 공공성 실천에 중점을 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대규모 외부 전시를 열어 더 많은 분이 편히 보실 수 있게 했죠."

지난해 8월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간송문화재단이 출범했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의 상설전시를 추진하고 있으며 후원회도 준비 중이다.

"첨단의 시대일수록 정신성과 문화가 중요합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우리의 뿌리는 조상의 얼이고 혼입니다. 새로운 것도 좋지만 옛것도 알아야 하고 교육도 그런 방향에 중점을 둬야죠. 뿌리가 튼튼해야 가지가 멀리 뻗고 잘 자랍니다. 누군가는 첨단을 개척할 때 누군가 뿌리를 지키는 일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보배를 둔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 뒤채에는 보물을 지키는 우리 시대의 보물이 살고 있었다.

He is …

△1934년 서울



△1953년 보성고 졸업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입학

△1958년 캘리포니아 미술대학(현 S.F. Art Institute) 졸업

△1960년 밀즈대학교(Mills College) 대학원 졸업

△1960년 미국 볼즈화랑(Bolls Gallery) 전속화가

△1960~1964년 밀즈대학(Mills College) 재직

△1964년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수료

△1966~1968년 이화여대 미술대학 출강

△1968~197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8~2013년 간송미술관 관장

△1971~1996년 보성고등학교 교장

△1996년~ 한국미술대상전(한국일보사 주최) 심사위원

△1996년~ 보성 중·고등학교 학교법인 동성학원 이사장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간송家는 예술 패밀리

잔 이사장·동생 전영우 관장은 화가… 자녀들도 미술 전공


"아버지는 주말마다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오늘은 문화의 날이다' 하시며 그림 주제를 주시고 채점도 하셨어요. 어떤 날은 '음악의 날이다' 하시며 수집하셨던 레코드판으로 명곡을 들려주셨어요. 축음기는 주로 제가 돌렸죠. 자연스럽게 문화와 접하며 살아가게 해주셨습니다."

간송은 3남 3녀를 뒀고 이들은 어려서부터 예술적 감성과 감식안을 가졌다. 차남이지만 맏이 격인 전성우 간송문화재단 이사장은 화가로서 주말이면 틈틈이 붓을 쥔다. 전 이사장의 부인은 '와사등' 김광균 시인의 딸이자 서울시 무형문화재 매듭장이다. 전 이사장의 2남 2녀 중 장녀 인지씨는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고 차녀 인아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화가다. 장남 인건씨는 간송문화재단의 사무국장으로 실질적인 재단 운영을 책임진다. 경영 컨설턴트인 차남 인석씨를 제외하면 모두가 문화계 종사자다.

전 이사장의 동생인 전영우 간송미술관 관장 역시 화가로 서울대 미대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상명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1남 2녀는 모두 예술가다. 장녀 인강씨는 금속공예, 차녀 인희씨는 섬유미술과 도예, 장남 인성씨는 조각을 전공했다.

·사진 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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