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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척 뿐이었던 한국 군함, 北의 부산 침투작전을 막아내다

[6·25 60주년 기획]<br>잊혀진 전쟁, 잊지 못할 모습들 <2> 전쟁 첫날의 쾌승, 대한해협해전

미 본토에서 백두산함을 구입해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갑판에 3인치 주포를 다는 모습. 해군 제공

백두산함(PC_701)의 전체 모습. 해군 제공

대한해협해전 한 달 전인 1950년 5월 20일 진해 부두에서 찍은 백두산함 승조원 기념사진.

최영섭 당시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당시 백두산함 갑판사관

월급 보태 美 돌며 배·포탄·연료 구입
실탄 100발뿐… 훈련 땐 쏘지도 못해
적함 갑판에 완전무장 600명 쫙 깔려
목숨 건 접근전으로 첫 출동 격침 쾌거
"6ㆍ25전쟁 첫날부터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이 부산을 농락할 수도 있었어요.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죠." 최영섭(83) 한국해양소년단 고문은 60년 전 그 날 바다에서 싸웠다. 한국군의 유일한 군함을 타고 첫 출전에 나서 북한군 수백 명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이날의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육지에서 전면전이 벌어졌는지 몰랐어요. 망망대해에서 맞닥뜨린 적 함정이 전부였죠. 실제 함포 사격이 처음이었으니 어찌 보면 기적이었어요." 최 고문은 광복 직후로 기억을 옮겨 갔다. 당시 군은 함포를 갖춘 변변한 군함 한 척 없었다. 미군이 넘기거나 일본군이 놓고 간 배들은 너무 낡아 작전이 불가능했다. 일본 어선들이 영해를 마구 넘어와도 속수무책이었다. 바다를 지키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해군이 나섰다. "하사 이상 군인들이 월급에서 10%씩 뗐죠. 해군사관학교 생도이던 내 월급이 9,000원인데 쌀 한 가마니에 1만5,000원이었어요. 그래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어요. 일부 장병들은 고물상에 고철을 내다 팔고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은 빨래와 뜨개질로 돈을 벌어 보탰어요." 그렇게 1만5,000달러를 모았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 돈을 들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우리도 대포가 달린 군함이 있어야 한다"고 간곡히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해군이 정말 대단하다"며 4만5,000달러를 보탰다. 장교 15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주에 있는 해양대에서 미군 참전 장교의 이름을 딴 화이트헤드라는 실습선을 1만8,000달러에 구입했다. 일종의 경비함인데 함포 레이더 등 무장을 다 떼내서 엔진만 멀쩡했다. 장교들은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두 달 여간 직접 배를 수리했다. 1949년 12월26일 흰색 페인트로 701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고 태극기를 게양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간 백두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두(白頭)와 화이트헤드(white head), 공교롭게도 같은 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갑판에 3인치 주포를 달았다. 괌에서는 포탄을 100발 구입했다. 그리고 연료를 채우니 갖고 간 6만달러가 빠듯했다. 50년 4월 9일 백두산함이 경남 진해시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 고문이 소위로 임관한 직후였다. "오랜 항해에 배가 새파랗게 녹슬었더라구요. 한 달간 또 정비를 했죠. 주포 외에 기관총 2대를 단 게 무장의 전부였어요. 그래도 얼마나 벅찼던지, 요즘의 이지스함도 부럽지 않았죠." 6월 초부터 전국을 돌았다. 태극기를 단 군함을 보기 위해 항구에 늘어선 사람들은 감격한듯 울먹이며 만세를 불렀다. 진해시로 다시 돌아온 것은 6월 24일 오후 11시30분께였다. "기혼자들은 다 외출하고 전 총각이라 당직을 섰어요. 그래도 다들 피곤하니 내일은 늦잠 좀 자자고 했죠. 밀린 빨래도 하구요. 그런데 바로 그 날이 운명이 될 줄은…." 6월 25일 오전 11시께 통제부사령관(대령)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북한군이 동해안에 기습 상륙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첫 출전이었다. 오후 8시께 백두산함은 진해시를 떠나 울산 앞바다로 나갔다. 막 어둠이 깔리는 수평선 너머를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이 "검은 연기가 보인다"고 보고했다. 연기를 좇아 20여분을 달려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최 고문은 당시 갑판사관 항해사 포술사의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적을 탐지하고 배를 움직이고 공격하는 일이다. "선체가 전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앞부분에 배 이름도 없고 국기도 달려 있지 않았어요. 깃발과 라이트로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죠." 수상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더 가까이 다가갔다. "쌍안경으로 보니 앞에 큰 대포가 하나 있고 갑판 양쪽에 기관포가 달려 있었어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갑판에 쫙 깔려 있고. 한 600명쯤 됐죠. 하지만 서치라이트를 비춰도 반응이 없었어요. 아마도 남쪽으로 조용히 지나가기 위해 먼저 공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북한군이었다. 배의 방향으로 봤을 때 부산을 향하고 있었다. 함장은 배를 일단 뒤로 빼라고 지시했다. 26일 0시10분께 본부에서 "적함으로 판단되면 격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함장은 8명의 장교를 모두 불렀다. 각자 앞에 놓인 물컵에 냉수를 따랐다. "이제 전투다. 살아서 다시 못 볼 지도 모르겠다. 나가서 싸우자. 건배." 최 고문은 병사들을 모았다. "죽어서도 시체는 깨끗하게 남기자"며 내의와 군복을 세탁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결전을 앞둔 그들만의 의식이었다. "첫 전투였지만 아무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어요. 오히려 밤바다를 비출 만큼 눈동자가 밝게 빛났죠. 제가 더 든든했습니다." 65명의 장병을 태운 백두산함이 적 함정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3,000야드(2.7㎞) 거리에서 첫 발은 공포탄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그러자 적 함정에서 수십 발의 포탄이 불을 뿜었다. 5발을 응사했지만 파도에 흔들리는 직사포이다 보니 조준이 어긋나 소용없었다. 이어 2,000야드(1.8㎞) 앞에서 30발 정도를 쏜 끝에 적 함정에서 불꽃이 튀었다. 함장은 전속력 접근을 명령했다. 다시 1,000야드(900m) 앞, 적 함정의 마스트(기둥)이 날아가고 기관실에 구멍이 뚫렸다. "눈앞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거리였어요. 내 살을 내 주고 적의 심장을 때리기 위해 계속 전진했죠." 다시 500야드(450m)까지 접근했다. 기관총을 얼마나 쏴 댔던지 포신이 자꾸 열에 달라 붙어 냉수에 식히고 다른 것으로 갈아 끼워야 했다. "포탄이 비 오듯 날아오는데 병사들이 머리를 숙이거나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더라구요. 죽고자 하면 사는 것, 그게 충무공의 정신이죠." 그때였다. 검은 연기와 함께 적 함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환호성도 잠시, 적의 주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조타실의 격벽 2개를 뚫고 들어와 터졌다. 너무 가까이 접근했던 것이다. 갑판 위에서도 병사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적 함정이 완전히 침몰한 것을 확인한 뒤 갑판 아래 의무실로 뛰어갔다. 병사들은 팔다리가 잘리고 온몸에 피를 흘리며 사방에 쓰러져 있었다. 군의관은 뱃멀미가 심해 목에 단 깡통에 계속 토하면서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자르고 꿰매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슴에 총탄을 맞은 전대익 이등병조가 날 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적 함은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격침됐다. 야, 살아야 돼. 정신차려"라고 외쳤지만 그는 얼굴을 잠시 펴지더니 "대, 한, 민, 국…"이라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개를 떨궜다. "제 귓가에 맺힌 마지막 말은 만세였어요. 영원히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죠." 군은 2명이 죽고 2명이 크게 다쳤다. 경상자도 수십 명에 달했다. 반면 적은 전멸했다. 4시간 동안 교전수역을 뒤졌지만 물 위에 떠 있는 기름띠와 옷가지가 전부였다. 부산에서 불과 40여㎞ 떨어진 수역이었다.
뒤에서 뚫렸다면… '교두보 부산' 없었다

"6ㆍ25전쟁의 성패를 가른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미 역사학자 노만 존슨은 저서 <6ㆍ25 비사>에서 대한해협해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백두산함과 한국 해군의 활약으로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북한군을 전멸시키면서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미 본토와 일본, 부산항을 연결하는 레드볼(red ball) 특별수송작전을 폈다. 부산은 남한에서 군수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부두 시설을 갖춘 유일한 곳으로 연합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할 숨통과 같은 곳이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전선이 부산까지 밀렸지만 해군이 우리의 보급로를 열어 주고 해군의 화력으로 상륙거점을 끝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고 당시 해군의 활약을 치켜세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대한해협해전은 한국 해군이 단독 출전해 성공한 최초의 작전이었다. 미국에서 사온 단 100발의 포탄을 아끼기 위해 훈련 때는 실탄을 쏠 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첫 교전에서 소중한 승리를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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