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악의 패전은 칠천량해전이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였고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었다. 그해 1597년 정유년 2월26일 이순신은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파면 당해 서울로 잡혀갔다. 이순신이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백의종군을 시작한 것은 4월1일이었다.
그동안 도원수 권율의 출전명령을 받은 원균은 먼저 육군 30만명으로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을 무찌른 뒤 수륙연합작전을 펴서 부산을 쳐야 한다면서 좀처럼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당시 조선이 3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면 임진왜란은 훨씬 전에 끝났을 것이다. 그때 조선은 명나라 구원병 1만명의 뒤치다꺼리만으로도 쩔쩔매고 있었는데 무슨 재주로 30만 대군을 동원한단 말인가.
장수들 오판으로 조선수군 참패
그해 음력 6월18일에 원균은 여러 차례 독촉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함대를 끌고 나갔다가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패하고 말았다. 패보를 받은 권율은 원균을 호출해 곤장을 치면서 재출전을 명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전함 200여척을 이끌고 출동했다. 7월4일 절영도에 이르니 1,000여척의 적의 대 선단이 숨어 있었다. 왜군은 우리 함대를 보자 후퇴를 거듭했다. 유인작전이었다.
적이 후퇴하자 원균은 승기를 잡았다고 오판,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부터 풍랑이 거칠어졌다. 우리 수군은 한산도에서부터 4일간이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배를 저어왔는지라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원균은 지친 함대를 수습해 가덕도로 후퇴했지만 벌써 왜군이 배후를 지키고 있다가 공격을 퍼부었다.
거기서 조선 수군 주력함인 판옥선 20척과 군사 400여명을 잃고 원균은 다시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왜군은 7월14일 거제도까지 쫓아와 이튿날 밤부터 칠천량에서 총공격을 퍼부었다. 사기가 떨어진 데다 허술한 경계로 기습당한 아군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사령관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배를 버리고 도주했다. 그렇게 해서 막강하던 조선 수군은 삽시간에 궤멸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했다.
北과 대치 경계 중요성 일깨워
정유년 7월15일의 이 칠천량해전 참패로 우리 수군은 180여척의 전함과 1만여 군사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렸으니 전멸과 다름없었다. 칠천량패전과 조선 수군의 궤멸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임진왜란 내내 장수들은 왜적과 싸우고 국왕 선조는 장수들을 죽이려고 들었다. 의병장 김덕령을 죽였고 곽재우도 죽이려고 했고 이순신도 그렇게 트집잡아 죽이려 했다.
칠천량패전은 상황 판단 못하는 국왕 선조와 병법에 어두운 도원수 권율 등이 왜적의 간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수군의 출전만 명령했기에 빚어졌다. 여기에 졸장 원균이 조연 노릇을 했기에 자초한 재앙이었다.
칠천량패전을 두고 경계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세가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장수가 판단력을 잃지 않고 제대로 지휘했다면, 또 병사들이 경각심을 갖고 철저히 경계했다면 그토록 참담한 패전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병법의 기본에 속하는 상식이다. 그런 까닭에 전투에 진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호전적인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국군에게 경계의 중요성은 백번 천번 강조해도 부족하다. 천안함이 기습 피격당한 것이 몇 년 전인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채 경계에 실패하는 지휘관이 나온다면 그런 장수는 그 옛날 원균과 별 다를 바 없는 무능한 졸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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