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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은 했다’ 최소한 해야 할 일은 다 마쳤다는 의미로 쓰는 말입니다. ‘밥값’은 말 그대로 밥을 먹고 살게끔 봉급을 제공한 회사에 그 이상의 가치를 되돌려줬느냐로 판단합니다. 영업부처럼 성과가 눈에 보이는 곳도 있지만 인사부나 기획부처럼 정성적 평가가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고 있는 일과 상황에 따라서 유무형의 가치를 측정하는 분야, 방식은 달라지지만 평가는 지속적으로 이뤄집니다. 의미 없는 지출이라면 계약이 파기되거나 책임을 물어 한직으로 발령내는 등 조치가 취해지죠.
지난 19일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고액 연봉 논란에 대해 “제가 대답해야 할 부분은 돈이 얼마나 드느냐를 떠나서 이 사람이 그만큼 일을 잘하고 있느냐”라며 “‘돈을 이렇게 받으면서 일은 잘못합니까’ 하는 것은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고, 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만큼 일 할 수 있으니 그 물건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정 예술감독이 취임 이후 서울시향의 연주 횟수는 2배, 관람객 수는 5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특히 유료 관객 점유율은 38.9%에서 92.9%로 2배 이상 증가했다고 하니 실로 ‘정명훈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클래식 공연에서 유료 관객 점유율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티켓 수입만으로 연주회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지휘자나 연주자를 초청하지 않은 채 자력만으로 이윤을 남기는 단체는 안타깝게도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신생단체의 경우 사실상 초대권으로 좌석을 채우거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들에게 표를 할당해 판매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런 고육지책을 쓰더라도 적자를 면하기 힘듭니다. 얼마 없는 자본금을 자꾸 까먹는 상황인데 단원들에 대한 처우가 좋을 리 없습니다. 한 달 봉급으로 40만~50만원을 내건 한 사립합창단의 단원오디션 경쟁률은 2:1을 훌쩍 넘겼다고 합니다. 한 지원자는 ‘생계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르바이트로 다른 일도 이미 하고 있다. 그만 둘 이유는 전혀 없다”고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조건만 살펴보면 1주일에 3일 이상 근무하고(연습) 연주를 앞두고는 주말마다 나와 시간을 할애해야 하니 얼마 전 논란이 된 ‘열정페이’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디자이너로서의 미래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처우처럼 ‘무대에 오르는 기회’를 위해 버젓이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지원자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노동 착취 수준인 근무조건과 처우에 대해 ‘좋은 조건’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지자체나 국가의 보조를 받는 단체를 제외하고는 무급이 아닌 것만 해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전보다는 괴리감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들 하지만 클래식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은 적은 편입니다. 서울시향의 공연으로 좋은 경험을 한 관객들이 폭넓게 예술을 향유하고 이로인해 예술산업 전반이 활성화되는 선순환 구축에 기여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정명훈 감독의 이름값 때문에라도 공연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은 그가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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