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후회도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그는 1975년 민중극단 '꿀맛'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37년 여의 세월을 그렇게 연기자로 살았다. 연극계의 대모로 사랑을 받기도, '학력 위조'라는 젊은 시절 치기 어린 실수로 대중의 따가운 시선도 견뎌야 했다. 어느덧 그의 나이 쉰 여섯, 대중의 뜨거운 사랑도 따가운 눈총도 큰 동요 없이 겸허히 받아들일 때가 됐다. 연극배우 윤석화(사진). '레테의 연가'(1987)이후 26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따뜻한 봄 햇살이 드리운 5일 오전, 평소 그가 즐겨 찾는다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한 카페에서 함께했다.
26일 개봉을 앞둔 영화 '봄, 눈'(감독 김태균)에서 그는 오로지 남편과 자식에 대한 헌신적 사랑밖에 모르는 엄마, 그러나 갑작스레 암 진단을 받고 뜻하지 않은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순옥 역을 맡았다.
"새벽 첫 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모든 엄마를 위해 이 영화를 바치고 싶다는 감독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장면 중에 순옥의 노모(老母)가 병동으로 딸을 위해 음식을 잔뜩 준비해와요. 그리고 말하죠. '먼 길 떠나려면 많이 먹어둬야 해'. 당장 내일 곁을 떠날 것을 알고도 눈물을 꾹 참고 뭐라도 먹이고픈 마음, 그게 모든 엄마의 마음 아닐까요."
윤석화는 온전히 순옥이라는 캐릭터에 동화되기 위해 삭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극 중 순옥은 계속되는 항암치료로 힘없이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직접 머리카락을 자른다. 여배우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에도 순옥이라는 인물에 녹아 들면서 얻어가는 메시지도 많았단다.
"잠자는 한 두 시간을 제외하고 병원에서 줄곧 촬영했어요. 마치 정말 암으로 고통 받는 환자 같았죠. 순옥으로 살아보니 그간의 제 삶, 죽음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어요. 값어치 있는 시간이었죠."
썩 유쾌한 가정은 아니지만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 시한부 인생이 주어진다면 윤석화의 남은 생(生)은 어떠할지 물었다. 망설임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순옥과 같이 살 것 같아요. 순옥은 죽음을 앞두고도 남겨질 가족들 걱정에 남은 삶을 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요. 외려 삶이 유한(有限)하면 그 끈을 놓아버리기보다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어 윤석화는 지금 당장 하늘에 계신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가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스스로는 오늘 죽는다 해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부족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생각해요."
굴곡진 삶이었지만 그가 내뱉는 '최선'이라는 말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윤석화는 열심히 인생을 달려왔다. 지난해 그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연극 '여정의 끝'과 함께 아시아인 최초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 오는 27일에는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 '톱햇'을 동명의 월드 프리미어(세계 초연(初演))로 연극무대에 올린다.
이를 위해 영화 개봉 전 런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그에게 '봄, 눈'을 보고 관객이 어떤 메시지를 얻었으면 하는지 물었다.
"50대의 이른 나이에 순옥이 가족 곁을 떠나는 건 인생의 봄날이 가는 거죠. 그러나 어김없이 또 봄은 와요. 다시 봄이 왔을 때 순옥이 남긴 게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어요. 언제 죽었느냐 보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느냐가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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