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중앙은행(SNB)의 전격적인 최저환율제 폐지 선언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여러 가지 위험한 신호를 보냈다. 당장 스위스 경제는 통화가치 상승으로 디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되며 스위스프랑화 대출이 많은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동안 유럽 국채를 사주던 스위스의 이탈로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완화 약발이 떨어지고 주요국 증시·국채, 금 등 자산 가격이 극도의 혼란을 보이는 등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SNB의 결정은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의 견인차였던 주요국 중앙은행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미국·유로존·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무려 10조달러의 시중 유동성을 뿌리고 장기간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했는데도 글로벌 경기는 여전히 취약한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SNB가 환율방어에 대해 사실상 항복선언을 하면서 다른 중앙은행의 신뢰도도 덩달아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유로존 등에 후폭풍 예고=일단 SNB의 결정에 외환 투자가들의 공포가 크다. 안정적인 통화정책으로 신뢰도가 높던 SNB를 믿고 스위스프랑화 약세에 베팅한 헤지펀드나 자산운용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 따르면 헤지펀드 등 투기적 투자자들의 스위스프랑화에 대한 매도 포지션은 2만4,833계약(35억달러 규모)에 달했다. 일부 투자가의 경우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스위스프랑화 가치 급등으로 헝가리·폴란드 등 동유럽 기업이나 개인 대출자들도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가령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이들 지역에서 많은 가계가 자국 통화보다 금리가 낮은 스위스프랑화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헝가리는 2011년 스위스프랑화 가치가 올랐을 때 수십억달러의 보유외환을 헐어 이들 대출자를 구제한 바 있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경제자문은 "스위스프랑 표시 부채를 가진 동유럽 국가들이 '역밸류에이션 쇼크'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SNB의 환율방어 포기는 ECB의 통화정책에도 부담 요인이다. SNB는 과거 유로화 연동된 스위스 프랑화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유로존 국채를 매입해왔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를 중단하면서 ECB가 돈을 풀어봐야 시장금리가 정책 의도보다 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SNB 때문에 오는 22일 열리는 ECB의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양적완화 실시가 기정사실화됐다는 점도 위험 요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ECB가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내놓지 않거나 소폭 매입에 그칠 경우 시장이 실망감을 보이며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중앙은행이 시장불안 요인"=더 근본적인 문제는 SNB의 '무질서한 후퇴'로 중앙은행에 대한 불신감이 커졌다는 점이다. 이번 SNB의 발표에 대해 이날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마저 "상당히 놀랐다"며 "적어도 (주요) 중앙은행장들과는 (사전에) 소통했어야 했다"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SNB의 결정으로 중앙은행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디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교훈이 생겨났다"고 비판했다. 스위스의 경우 과거에도 저물가 위협에 시달렸는데 최저환율제 폐지로 디플레이션 위험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중앙은행(BOJ)과 ECB도 조만간 양적완화를 실시하더라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회의론이 증폭되고 있다는 게 NYT의 설명이다. 특히 투자가들이 중앙은행의 포워드 가이던스(통화정책 선제안내)나 메시지를 믿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시장 혼란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또 글로벌 경기 디커플링(비동조화) 여파로 각국 중앙은행들의 '나 홀로' 행보가 본격화하고 있는 게 불안 요인이다. 이날 SNB의 발표 6시간 전에 인도중앙은행(BRI)도 예정에 없던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7.75%로 0.25%포인트 깜짝 인하했다. 전날 12월 물가지표가 기대치에 못 미치자 시장의 예상을 깬 것이다.
통화정책 다변화로 인한 금융시장 요동은 연준의 통화정책 정상화에도 지장을 주고 있다. 안전자산 선호 현상에다 유로존·일본의 양적완화로 달러화 가치가 급등하며 수출 등 미 경제에 부담을 주면서 기준금리 인상 시기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이날 "중앙은행들이 더 이상 공조하지 않고 금융시장의 진정제에서 변동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며 "통화정책 정상화의 길이 험난하다는 사실도 새삼 입증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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