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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우리말로 서풍을 뜻하는 하늬바람은 딱 요맘때 부는 가을 바람의 다른 이름이다. 역사와 운치가 깊은 서촌(西村)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갤러리시몬에서 '서풍이 본 것(what the West Wind Saw)'이라는 제목으로 작가 황혜선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새까만 윤곽선으로 그려진 풍선을 든 아이들과 먼저 마주하게 된다. 최소의 표현 단위인 선만으로 표현된 인물들은 유려하고 단아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하얀 벽면에 굵은 먹으로 그린 듯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이것이 견고한 스테인레스스틸로 제작된 입체 조형물임을 알 수 있다. 황혜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드로잉 조각'. 실제로 먹으로 형상을 그린 다음 획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조각으로 옮겨 제작한 것이다. 벽에서 살짝 떨어져 설치된 작품들은 조명을 받아 형성된 '그림자'와 함께 깊이감과 여운을 갖는다.
"매일 아침 작업실에 들어가면 먹을 갈아 일기를 쓰듯 드로잉한다"는 황혜선은 "작가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 드로잉이며 그런 드로잉이 공간 속으로 들어오면 좋겠다 싶어 조각으로 번역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신작에는 처음으로 색깔 있는 LED조명을 사용해 화사함을 더했다.
2층 전시장에는 일명'풍선 거울'들이 전시됐다. 가열된 유리를 물방울 모양으로 불어서팽창시킨 다음 은(銀)을 담가 거울 같은 표면을 만들었다. 그 매끈한 면에 고운 모래가루를 깎아내 그림을 그렸다. 이국적 거리, 집과 놀이터, 손잡은 두 사람, 끌어안은 커플 등 작가가 포착한 일상의 좋은 기억들이 소재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투명한 거울 속 풍경에 자신까지 함께 넣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인문학자인 이현우(필명 로쟈)씨는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들의 바람은 바람(風)이면서 바람(願)"이라며 "스냅사진 같은 한 순간을 오래 보존하고자 한 작업"이라고 서문에서 평했다.
3층 전시장에 하얀색 드로잉 조각으로 펼쳐놓은 작가의 작업실 풍경까지 보고 나면, 드뷔시의 전주곡에서 따왔다는 전시제목의 '서풍'이 작은 숨결만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따뜻한 인간애임을 깨닫게 된다.
서울대 조소과와 미국 NYU미술대학에서 수학한 작가는 뉴욕ㆍ파리 등 국내외 전시를 통해활동해 왔으며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등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전시는 10월18일까지. (02)549-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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