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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게 말하면 ‘좀팽이’, 좋게 표현하자면 ‘합리적인 소비자’로 알려진 일본 사람들은 동료들과 식사를 한 후 “내가 산다”는 말을 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식당 계산대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밥값을 따로따로 내기 때문에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또한 살인적인 교통비 때문에 택시로 귀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웬만한 술자리는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을 넘기는 법이 없다. 좀더 싼 밥집을 찾아 짧은 점심시간에도 두어 정거장은 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는 40~50대 샐러리맨들과 ‘폭탄세일’을 찾아 옆 동네 슈퍼마켓까지 자전거 페달을 밟는 주부들의 모습은 불황에 빠진 일본 소비자들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국내에서도 적잖이 소개됐다. 그런데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뭘 저렇게까지 하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국내 소비자들이 어느새 이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계산할 때 잔돈이 많이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각자 밥값을 계산하는 더치페이가 늘어나 잔돈 교환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쿠퐁 발행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발행 쿠퐁의 회수율은 지난 1월 15%에서 4월에는 24%로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특히 계산대에서 할인 쿠퐁을 내밀면 “채신이 떨어진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40대 남성들의 쿠퐁 사용률도 높아졌다. 반면에 서로 돈을 내겠다며 계산대 앞에서 언성을 높이던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다. 직장인의 회식 2차 코스였던 한 술집 주인은 “요즘에는 오자마자 공기밥과 찌개를 주문하는 손님이 늘었다”고 말했다. 술집에서 1, 2차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알뜰주당’들이 늘어난 것이다. 손님 끌기용으로 10원짜리, 50원짜리 옷을 내놓은 일부 백화점에는 그동안 발길이 뜸했던 주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끝이 안 보이는 장기침체로 달라진 소비자들의 모습이 암울하게 비쳐지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번 불황이 지나치게 부푼 소비의 거품을 거둬내고 합리적인 ‘알뜰 소비자’들을 대거 양산하는 ‘순기능’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품경제에 들떠 있다가 10년 넘게 불황과 신용불량으로 고생한 일본 소비자들은 철저한 경제 마인드로 재무장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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