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는 앨프리드 마셜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케임브리지 대학 중심의 영국 경제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이에크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설파하는 자본 투자 이론 중심의 유럽 대륙 경제학파가 뿌리였다. LSE(런던정경대학)측은 케임브리지를 누르고 영국 경제이론의 산실로 발돋움하고자 했다. 케인스를 평소 경제학계 돌팔이로 여겼던 LSE 학장 윌리엄 베버리지와 LSE정치경제학부 라이어널 로빈스 교수가 합심해 케인스의 코를 납작하게 할 만한 소장 경제학자를 물색했고, 이때 오스트리아학파의 새내기 하이에크가 눈에 띄었다. 로빈스 교수가 주관한 몇 차례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하이에크는 LSE교수로 마침내 임용됐다.
두 천재 경제학자의 대격돌은 1931년 여름, 하이에크가 로빈스 교수가 편집 주간으로 있었던 학술지 '이코노미카'에 케인스의 '화폐론'을 비판하는 서평을 기고함으로써 시작됐다.
책은 경제학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두 명의 학자가 벌인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두 사람 생전의 논쟁은 물론 2008년 금융위기와 더불어 이들이 재조명되는 흐름까지 분석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가장 큰 견해차를 보인 부분은 경기 순환의 작동 방식, 즉 불황이 나타나는 원인과 해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처 방법의 차이는 국가냐, 시장이냐 라는 경제학 최대의 논쟁거리로 수렴된다.
두 학자의 대표적인 논쟁은 1930년대 대공황 시대 불황의 해법을 놓고서다. 케인스는 저축되는 돈이 투자되는 돈보다 많아지면 불황 국면이 나타나고 그에 동반해 물가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물가 상승은 저축을 늘림으로써 억제할 수 있고 불황은 투자를 확대하고 총수요를 늘려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케인스는 이런 수요를 만들어낼 기업이 없다면 정부가 공공사업을 통해 자체적으로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하이에크는 불황이란 생산자가 은행 융자로 돈을 빌려 자본재를 더 많이 생산하는 경우 등으로 통화량이 늘어나 신용이 과잉 팽창한 결과라고 봤다. 대공황도 투자가 저축보다 많아서 발생했다는 분석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위적으로 조절해 저축과 투자에 개입하는 것을 문제의 핵심이라고 꼬집었다. 국가가 통화시스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경기 순환도, 불황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케인스의 이론은 1960년대까지 경제학계를 지배했지만 1970년대 불황기 이후 하이에크에게 헤게모니가 자연스레 넘어갔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부시 미국 대통령이 무덤에서 케인스를 불러내면서 다시 논쟁이 불붙었다. 2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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