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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3월28일] 콩도르세

[오늘의 경제소사/3월28일] 콩도르세 권홍우 ‘양성 평등, 공교육 강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 콩도르세(Condorset)의 슬로건이다. 콩도르세는 경제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도박에서 승리할 가능성이나 따지던 확률이론을 선거에 대입해 실생활의 학문으로 끌어들였다. 1743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학 신동 출신. 26세의 나이에 과학학회 정회원으로 파격 선출된 후 볼테르, 애덤 스미스 등과 교류하며 당시 학계의 최대 과제였던 ‘대백과사전’ 편찬에서 경제 분야를 맡았다. 지방 조폐국장, 프랑스아카데미 사무총장까지 올랐지만 사교적 세련미가 부족했던 탓에 노총각으로 지내던 그는 42세 때 파리 최고의 미인이라는 20세 연하의 소피와 결혼, 가정을 꾸렸다.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인 라파예트 장군의 애인에서 콩도르세 후작부인이 된 소피는 집을 살롱으로 개조해 지식인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다. 확률을 정치에 대입, ‘선거 결과가 유권자들의 의도와 달라질 수 있다’는 ‘콩도르세 패러독스’가 담긴 저술도 결혼 후 아늑함과 활발한 지적 교류에서 나왔다. 1791년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여자와 유색인종을 포함하는 의무교육 실시 등 공교육 혁신을 부르짖었다. 진정한 자유와 정치적 평등은 대중에 대한 교육에서 나온다는 생각에서다. 이후 삶은 내리막. 1793년부터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공포정치를 펼친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당과 반대파였기 때문이다. ‘최고의 클럽, 공화국의 중심’으로 불렸던 콩도르세 후작부인의 살롱 단골들과 함께 피신하다 체포 하루 만인 1792년 3월28일 감옥에서 죽었다. 향년 51세. 타살설이 돌았다.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잊혀졌던 그의 확률이론은 20세기 중반 이후 재평가받기 시작, 197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케네스 애로’ 같은 후학으로 이어졌다. 입력시간 : 2006/03/2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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