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던 국제 유가가 불과 6개월도 안 돼 반 토막이 난 데는 미국 셰일혁명의 발목을 잡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감산을 유보한 것이 가장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유가가 심리적 마지노선인 배럴당 60달러 밑으로 곤두박질치는데도 사우디와 미국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유가 폭락의 직격타를 입은 러시아 경제가 지난 1998년과 같은 위기로 내몰리는 상황이 전개되자 시장에서는 이번 유가 하락의 배경에 미국과 사우디의 '러시아 죽이기' 전략이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최근 미국 일간 시카고트리뷴은 이번 유가 하락은 미국의 셰일유 생산자에 대한 사우디의 전쟁 선포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시장에서 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우디가 '공공의 적'인 러시아 죽이기 차원에서 미국과 손을 잡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고 전했다.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 입장에서는 시아파인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러시아에 대한 불만이 큰 상태다. 미국 역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이후 러시아를 공공연하게 적대시하는 상태다. 미국과 사우디는 서방의 이란 핵협상을 놓고 최근까지 껄끄러운 사이였지만 최근 미국의 이슬람국가(IS) 격퇴작전에 사우디가 참여하는 등 양국 관계는 회복되고 있다.
특히 최근 지속되는 유가 폭락으로 러시아에서의 외국인 자본유출이 가속화하면서 러시아 경제가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이 같은 음모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와 '신냉전'에 돌입한 미국이 유럽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돌입하는 한편 사우디와 함께 유가를 떨어뜨려 러시아 경제를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수출 실적의 3분의2를 에너지 사업에 의존하고 있어 유가 하락이 지속되면 러시아 경제는 급격한 경기침체와 외환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10월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가 제기한 후 증폭되고 있는 이 같은 분석은 일부 OPEC 회원국 사이에서도 공공연하게 거론된다.
저유가로 디폴트 위기에 직면한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과 일부 미국 우방국들이 유가를 떨어뜨리려는 이유는 러시아에 해를 끼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의 전직 석유장관도 시카고트리뷴에 "사우디는 주요20개국(G20)의 이익에 부합하게 움직인다"며 이 같은 음모론을 뒷받침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자신도 이 같은 서방의 음모론을 주장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최근 유가 추이는 정치적 요인이 배경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6월 중순까지 배럴당 110달러를 웃돌았던 세계 3대 유종 모두 가격이 이달 들어 줄줄이 반 토막 난 실정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가 감산에 나서면 유가 회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부 장관은 10일(현지시간) 유엔 회의에 참석해 감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왜 감산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시장에서는 사우디의 감산 거부에는 '숙적'인 이란 경제에 타격을 가하고 전통적 에너지 강국인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으로부터 시장을 지키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은 주요 산유국이면서도 30여년에 걸친 경제제재로 저유가가 계속되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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