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청년장교는 밤이면 고민에 빠졌다. '인간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싸울까.' 영국·프랑스연합군과 러시아가 1854년 가을부터 318일간 펼쳤던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러시아군 포병 중위로 참전한 레프 톨스토이는 정신경험의 조각을 모은 3연작 단편집 '세바스토폴 스케치(1855)'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청년의 뇌리에 새겨진 치열했던 공방전의 기억이 없었다면 거작 '전쟁과 평화(1869)'도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를 전율케 했던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포성은 모두 23만8,387명의 전사자를 내고서야 멎었다. 그로부터 87년이 흐른 1941년 10월부터 250일간 독일군과 소련군이 도시를 놓고 싸워 25만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소련의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지 슬라브인을 열등민족으로 여기던 독일군은 '개가 사자처럼 싸운다'며 혀를 내둘렀다. 러시아가 18세기 말 군항으로 건설했던 이 도시는 요즘에도 러시아 민족주의 팽창과 맞물려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지난 19일 세바스토폴의 우크라이나 해군사령부를 급습한 친러시아 자경단의 병력은 200여명. 한 줌의 무장세력에게 우크라이나군 1만여명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탓이다. 기동장비들도 부품이나 연료가 없어 작동하지 않았다. 소련 해체 직후 핵을 포함해 세계 5위권이라던 우크라이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정치권의 부패.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2005년 개봉작 '로브 오브 워'에 고가무기를 무게로 팔아먹는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예전의 공방전과 달리 맥없이 붕괴한 21세기의 세바스토폴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 군의 군수지원 시스템을 컨설팅했던 영국군 장성 출신 맥킨지 직원이 '한국군이 이런 상태로 어떻게 전쟁을 치르려고 하느냐'고 지적했단다. 부패는 성립할 수 없겠지만 군수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하긴 3억원 예산으로 맥킨지로부터 군수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받았다는 발표 자체도 못미덥지만./권홍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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