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효자산업서 외환위기때 쇠락의 길로
해외브랜드 유통업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우리 손으로 애니 만들자" 직원 똘똘 뭉쳐
토종캐릭터 '또봇' 탄생… 완구시장 돌풍
지난 2009년에 첫선을 보인 후 어린이완구 또봇은 말 그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2009년 209억원에 그쳤던 매출이 또봇이 완판 행진을 이어간 2012년에 542억원, 2013년에는 761억원을 달성하며 영실업은 레고코리아에 이어 매출 기준 국내 완구기업 2위로 등극했다.
지난해 역시 성장세는 이어져 약 1,100억원의 매출이 예상된다. 외국 브랜드 일색이었던 완구 시장에서 토종 브랜드가 우뚝 선 것이다.
이렇게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영실업은 지난 10여년 동안 '미생'이었다. 외국 브랜드 완구 유통업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힘든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것.
한때 완구산업은 고속성장을 이끌던 대표적인 수출 효자산업 중 하나였다. 완구산업이 정점을 찍었던 1987년에는 수출액이 11억달러(약 1조1,000억원)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저임금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에 의존하던 완구기업들은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대부분 몰락하게 된다. 일부 생존에 성공한 기업들은 해외 유명 브랜드 유통에 치중하며 간신히 부도만은 면하는 처지였다.
3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실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20년 가까이 완구 제조업을 해오며 700명의 직원을 거느리던 이 회사는 외환위기 이후 디자인·개발·생산·유통 등 부서별로 핵심인력만 남기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한 뒤 단 50명만 남게 된다. 아울러 공장 운영 관련 규정집만 몇 권에 달하던 군대 같은 조직에서 최신 정보기술(IT)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소통하고 직원부터 최고경영자(CEO)까지 보고가 단 2단계 만에 이뤄지는 유연하고 가벼운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체질개선을 이뤄냈지만 완구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 10년간 해외 유명 브랜드 유통업으로 생존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자체 캐릭터 개발에 힘썼지만 토종 완구 선도기업으로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맛봐야 했다.
15일 서울 한남동 영실업 본사에서 만난 한찬희(41·사진) 대표는 "해외 유명 완구 브랜드 유통업으로 전환하며 회사는 살아남았지만 언제 토사구팽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면서 "유통업무는 절대적 을의 처지이다 보니 소위 말하는 각종 갑의 횡포를 일선현장에서 오랫동안 겪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으로 근무하던 한 대표는 2002년 영실업에 입사했다. 그는 "수요 예측이 어려운 크리스마스 물건을 6개월 전에 발주하라는 소위 밀어내기가 일상이었다"며 "마진 역시 1%로 고정돼 있어 역마진을 감수하고 사실상 끼워팔기로 살아남을 것을 강요 받았을 정도"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유통업에 안주하지 않고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기 위해 한동안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에 모두 참여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제작환경의 구조적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매번 실패를 맛봐야 했다.
2000년대는 방송사·투자사·완구업체 등 각종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제작위원회를 만들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처한 입장과 성향이 제각각이다 보니 애당초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오기 어려웠다. 애니메이션·도서·문구·완구·캐릭터·생활용품 전반에 걸쳐 무리 없이 어울려야 하는 만큼 캐릭터 역시 참신성보다는 안전하고 무난한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한 대표는 "한때 100억원의 투자를 받고 유명 프로덕션과 협업 아래 무비 제작에 나섰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제작자는 자기 마음대로 키즈 비즈니스 효과는 무시한 채 풍경이 좋은 곳만 돌아다니며 촬영을 마쳤다"며 "그 결과 키즈 무비임에도 정작 완구 캐릭터는 찾아볼 수 없어 작품도 망하고 연관된 종사자까지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던 적도 있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외에도 프로젝트 진행 도중 작가나 감독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로봇완구를 만들기 위해 각종 금형 관련 설비투자를 했는데 감독이 작품에서 해당 캐릭터를 빼는 등 예상치 못한 시련을 모두 맨몸으로 겪어야 했다. 마치 시행사가 부실공사를 신경 쓰지 않듯이 제작위원회의 펀딩이 끝나면 이미 돈을 다 번 것이나 다름없는 제작사들이 프로젝트 관리를 소홀히 하는 것 역시 고품질 애니메이션 제작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벽이었다.
이처럼 토종 완구 선구자로서 다양한 실패를 맛봐야 했던 영실업은 '기존에 했던 실패만 반복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기존에 제작위원회 방식을 지탱하던 원소스 멀티유즈 방식을 탈피해 수익모델을 가장 먼저 고려해 완구를 만들고 이에 어울리는 애니매이션을 직접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또봇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 대표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며 설사 실패하더라도 우리 손으로 집적 만든 애니메이션을 방송에 직접 선보이겠다는 의지로 전 직원이 똘똘 뭉쳤다"며 "그 결과 한국 완구 역사상 최초로 직접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TV에서 처음으로 방영됐던 시간은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자금과 경험 등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국내에서 직접 개발한 캐릭터와 스토리의 힘을 전 직원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기존 해외 인기 로봇과 관련 애니메이션은 지구를 지키는 영웅인 탓에 폭력성을 필연적으로 띨 수밖에 없었다"며 "이러한 경향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한국 사람이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주변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친구인 또봇이 오히려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호소력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한 대표는 아직 성공을 논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한다. 그는 "국내 완구 시장은 전통시장으로 불리며 한때 지체된 산업이라 여겨졌지만 최근 들어 글로벌 완구 브랜드들이 직접 현지 지사를 차리며 뛰어들 정도로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이라며 "현재 영실업은 전체 완구 시장 판매량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수십조원의 매출을 거두는 글로벌 브랜드들과는 여전히 골리앗과 다윗 관계"라고 진단했다.
한 대표는 IMF 이후 유지해온 영실업 특유의 유연한 조직문화와 개방적 협력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복안이다. 그는 "수만 명의 인재와 오랜 기간 축적된 시스템을 가진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직원 수가 170명에 불과한 영실업은 모두 열세"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부 관계자와 효과적으로 협력하며 가상의 몸집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 제작사, 방송사, 유통업체, 도소매 거래처 등과 단순한 계약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사전제작 과정과 판매전략 등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을 최대화해 외부의 인력과 아이디어를 최대한 활용하는 식이다.
영실업은 최근 비전 선포식을 열고 오는 2017년까지 2,5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완구 시장의 성장성에 대한 회의 역시 만만치 않다. 아울러 완구 역시 디지털화의 물결 속에 이용인구가 줄어들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에 한 대표는 "5,000년 전 어린이들이 흙으로 된 인형을 갖고 놀았듯이 현대의 어린이들도 여전히 레고 브릭이나 아날로그 완구를 찾고 있다"며 "모든 시장이 디지털 물결을 피할 수 없지만 아이들의 감성과 취향만큼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아울러 완구 시장을 단순히 아날로그 시장으로 볼 게 아니라 이제는 캐릭터 시장이자 콘텐츠산업으로 봐야 할 시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국은 콘텐츠산업의 불모지였던 만큼 역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설명이다.
한 대표의 최종 목표는 영실업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콘텐츠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 그는 "이미 완구산업본부·영상산업본부·라이선스사업실로 조직을 분류하며 콘텐츠기업으로서 조직 정비를 완료했다"며 "매년 새로운 콘텐츠를 1~2개 발표하며 어린이들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는 콘텐츠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회사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포부를 나타냈다.
"친구 같은 토종캐릭터 한국정서 다룬 애니로 세계 동심 사로잡을 것" 박진용 기자 |
● 한찬희 대표는 |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