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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2월 26일] 위기설 해부

오래전에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모 은행지점에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지점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은행이 파산위험에 처한 것도 아닌데 은행에 예금자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돈을 찾아가는 일종의 뱅크 런(bank-run)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황당한 소동이 벌어지게 된 원인은 엉뚱한 데 있었다. 은행지점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는데 버스가 늦어져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것이 화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을 마치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너도 나도 예금인출에 나선 것이다. 경제학에 등장하는 사람은 차갑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제인을 가정하고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종종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분위기에 너무 흔들리는 환율
지난해 9월에 이어 또 외환위기설이 나돌면서 환율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겪는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유독 한국이 되풀이되는 위기설로 더 큰 고통을 겪는 것을 생각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동아시아 화폐들 중에서 유난히 원화 절하폭이 크고 변덕스럽다. 이번 위기설의 표면적인 이유는 2월과 오는 3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외채가 많다는 것이다. 평소에 비해 다소 많기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금액도 많아야 100억달러 남짓하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외환보유액이 2000억달러가 넘고 미국과 통화 스와프 장치까지 마련돼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위기설은 지나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수출이 어렵기는 해도 저유가와 고환율 덕분에 수입과 해외 소비가 크게 줄면서 국제수지도 흑자로 돌아서고 있다. 크게 보면 이번 위기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꼴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위기설의 핵인 100억달러에 대한 최선의 해법은 무사히 만기가 연장되는 것이다. 일본의 회계시점과 맞물려 있고 국제금융시장의 경색이 악화되고 있어 전액 만기연장을 낙관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만기연장이 전혀 안 되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일부 만기연장이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차환을 하거나 정 안 되면 외환보유액을 헐어서 갚으면 될 것이다. 며칠 전 정부가 외환보유액은 종이 호랑이가 아님을 강조한 것은 이런 면에서 시의적절한 입장 표명이다. 돈을 빌려간 쪽의 갚을 능력과 의지가 확인되고 신뢰가 유지된다면 채권자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돈을 갚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안목으로 불안요인 제거를
이렇게 따져놓고 보면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정되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우선 대외신용도가 흔들리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하면서 금융부실화 가능성의 최대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계부채와 이에 따른 은행건전성 악화가능성에 대한 선제대응이 절실하다. 북한발 돌발변수도 문제고 혼란을 틈타 단기간에 이득을 챙기려 발호하는 환투기세력들도 경계 대상이다. 위험으로 가득찬 금융환경을 헤쳐나가는 데 과거 쓰라린 외환위기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가안정을 성우(聖牛)로 떠받드는 멍청한 고금리 저환율정책, 종금사들의 외환불장난을 방치한 무책임한 자본시장개방, 기아자동차의 부도유예협약과 같은 미봉책들이 어우러져 재앙을 낳았다. 위기설을 잠재우려면 넓은 안목과 정책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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