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30일 조선왕조 600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국왕이 적국 수장에게 직접 항복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 '이종'은 지금의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병자호란은 앞서 임진왜란과 달리 조선이 완패한 사건이다. 때문에 이는 조선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추구다. 패전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와 경제력 확대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된다. 숙종·영조·정조대의 성공은 이를 바탕으로 했다. 부정적인 면도 컸다. 만주족 청에 대한 적대감은 조선의 사상이 경직되는 계기가 됐다. 융통성 있던 기존의 성리학은 외골수로 흐른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라도 조선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이유에서였다. 흔들리는 신분제도를 지키려는 자기방어적 의식에서였다. 사진은 석촌호숫가에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다. 청이 조선으로부터 항복 받은 사실을 기억시키기 위해 세우게 했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몽골문·만주문·한문의 3종의 언어로 내용이 적혀 있다. 참고로 삼전도의 '도'는 섬이 아닌 강나루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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