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결정할 크림자치공화국 주민투표를 앞두고 서방과 러시아 간의 대립이 한층 날카로워지고 있다. 러시아는 서방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군사훈련을 벌였고 투표를 앞두고 긴장이 고조된 우크라이나에서는 시위대 간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서방의 강력한 제재가 현실화되면 러시아에서 한 분기에 무려 500억달러(약 53조6,000억원)가 유출될 것이라는 경고도 제기됐다.
알렉세이 쿠드린 러시아 경제위원회 최고위원은 13일(현지시간) 현지 산업·기업인연맹 회의에 참석해 "서방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유로 러시아에 대한 본격적인 제재에 나설 경우 한 분기에만 약 500억달러의 자본이 러시아를 이탈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러시아 경제성장률은 지난해의 2.5%보다 훨씬 하락할 것"이라며 "전문가들은 1.5% 성장을 전망하지만 1% 또는 제로 성장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쿠드린은 지난 2000년부터 11년간 재무장관을 지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체제의 핵심 인물로 현대 러시아 경제체제의 설계자로 통한다. 그는 이미 서방 은행들이 러시아 기업들의 신용한도를 줄이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 "이런 제재는 국내외 투자자와 국민의 투자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외국 기업들의 러시아 내 활동중단 가능성도 우려했다.
제재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에도 러시아는 이날도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병력 1만여명을 동원한 비상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긴장 수위를 높였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러시아 남서부 로스토프스카야주(州), 벨고로드스카야주·쿠르스카야주 등과 서부 탐보프스카야주 등에서 비상 군사훈련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번 훈련지 가운데 3개 주가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수많은 러시아 군용차량과 병기들이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배치돼 있으며 낙하산병 1,500명도 로스토프스카야주에 추가로 투입됐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은 지원요청을 받았던 벨라루스에도 이날 수호이-27 전투기 6대와 수송기 3대를 파견했다.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군도 전투준비 태세에 돌입했으며 11일부터 크림반도 바로 위에 위치한 헤르손주(州)에서 비상 군사훈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세니 야체뉴크 총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해 "러시아가 불법적 군사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임시 대통령은 "러시아가 침공해오더라도 전쟁준비는 끝났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 방침도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경고한 데 이어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이날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 결정되면 다음날부터 서방 국가들이 연속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추가 제재를 시사했다.
또한 서방 국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임을 재확인하는 결의안 채택을 논의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 문제를 유엔총회에 발의할 계획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버티고 있어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무기를 비롯한 군사적 지원 요청도 검토하고 있다고 미 국방부 관리들이 밝혔다. 이들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전면전 가능성과 러시아와의 긴장고조를 우려해 현시점에서는 전투식량 지원 선에서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를 부인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11일 야체뉴크 총리의 방미에 맞춰 미국에 무기·탄약·군사정보 등의 지원을 요청했다. CNN은 "터키에 정박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항공모함 조지HW부시호가 계획보다 더 오래 머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한편 16일 주민투표에서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병합 결정이 예상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충돌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는 등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크림반도에서는 무장한 친러 자경단이 우크라이나 군대를 봉쇄하며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계가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는 친러시아 시위대 2,000명이 행진하던 반러시아 시위대를 공격해 20대 청년 1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다쳤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 이후 시위에 따른 사망자 발생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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