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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맨' 꿈 접고 30년 금융인 외길 은행 기업금융 업무경험 발판삼아
부국증권 IB본무 대표로 자리 옮겨 송도 대학캠퍼스 주도하며 유명세
코리아RB증권 인수… CEO 변신
규모의 성장보단 질적 발전 이뤄 중소형 증권사 롤모델로 만들 것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삶의 방향성이 정해지는 경우도 많다. 기동호 코리아에셋투자증권 대표에게는 27세 겨울에 첫 번째로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기 대표는 그때만 해도 대형 종합상사로 이름을 날린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와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의 면접 일자가 겹친 것이 앞으로의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꿈꿔온 '상사맨'의 길을 포기하고 한일은행에 입사한 그는 은행과 증권사를 넘나들며 30년째 금융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지난 1986년 한일은행에 입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일반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문화가 있는 은행과 기 대표의 성향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인들의 의심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전교회장, 보이스카우트 회장, 대구·경북 지역 청소년적십자연맹 연합 회장 등을 지냈다. 지인들은 기 대표가 창업을 하거나 영업 전선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그가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것도 종합상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기 대표가 진로를 갑작스럽게 바꾸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위로 세 명의 형이 모두 삼성·현대·럭키금성(현 LG) 등 대기업에 입사하자 부모님은 그에게 "은행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4남3녀의 막내아들로 자란 기 대표로서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입사 후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삼성 본관 지점에 배치받은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건물 입구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고객인 삼성 임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기 대표는 "삼성에 근무하는 많은 선후배들이 알아보는 탓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며 "처음 한두 달은 은행에서 벗어날 궁리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해외 출장을 준비하던 한 삼성 직원이 한일은행에 찾아와서 "환전을 하고 싶은데 외환은행이 어디 있느냐"고 물은 것이 계기가 됐다. 해외여행이나 출장이 쉽지 않았던 때였기에 삼성의 직원들도 환전이 외환은행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던 것이다.
새로운 시장을 발견한 기 대표는 즉각 움직였다. 지점장과 직원들을 설득해 환전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다. 홍보활동을 하는 것이 싫어 은행을 나갈 궁리까지 했던 그였지만 '우리도 환전합니다'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삼성 본관 인근에서 쉬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점심을 김밥으로만 해결하며 한 달쯤 캠페인을 진행하니 환전 창구에 사람이 가득하게 됐다. 한일은행 전국 지점 중에서 환전 실적 1위를 기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과 현장에서 답을 구하는 기 대표의 경영철학은 그때부터 싹텄다.
일반 업무를 거쳐 삼성의 무역금융을 담당하게 되면서 그의 능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해외 신용장(LC)이 들어오면 이를 번역한 뒤 환어음 및 선적서류를 매입해주는 게 기 대표의 역할이었다. 외화가 부족했던 시절이어서 정확하게 일처리를 한 뒤 하루라도 빨리 수출대금을 받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 번은 영어 대신 스페인어로 된 LC가 날아들었다. 사무실에서 스페인어 사전을 끼고 한참을 헤매던 기 대표는 결국 모교를 찾아갔다. 대학 동문을 통해 소개받은 스페인어학과 대학원생의 도움으로 LC의 번역을 끝내고 수출대금을 지급받았다. 그때부터 삼성은 비영어권 무역금융 관련 일거리를 대부분 그에게 의뢰했다.
뛰어난 성과를 보인 그를 경쟁 은행에서 내버려둘 리 없었다. 기 대표는 동화은행(현 신한은행)의 삼성 전담 영업점인 서소문지점과 하나은행 삼성센터지점을 거쳐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금융권에 뛰어든 뒤 하나은행 광명지점장으로 부임하기까지는 불과 10여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은행에서 탄탄대로를 걷던 기 대표는 2000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부국증권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고 투자은행(IB) 사업본부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기 대표는 "은행에 비해 증권사는 지분투자, 채권 발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고 자본시장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이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국증권에서 IB 사업의 기틀을 닦으며 매일같이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은행에서는 기본적으로 들어오는 예금과 대출을 통해 고정수익을 낼 수 있었지만 거래건별로 수수료를 받는 증권사에서는 하루하루를 전쟁터에 나선 군인처럼 지냈다는 게 기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15년간 은행에서 기업금융 업무를 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출금 회수 가능성을 평가했던 그는 증권사에 와서도 단기적 수익률에 목을 매는 일이 없었다. 기 대표는 직원들에게 단지 주식을 매입하는 게 아니라 회사를 산다는 마음가짐으로 업무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내던 기 대표는 2009년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글로벌 대학 캠퍼스를 조성하는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증권 업계는 물론 정관계에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정부와 인천광역시가 주도하는 1조원 규모의 공공사업 매칭펀드(공동출자) 프로젝트에 부국증권 IB 사업본부가 민간자금 조달 사업자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수천억원 규모의 민간자금을 끌어들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정부의 예산 배정에서 차질이 생겨 사업 전체가 틀어질 위기에 놓였다. 그때부터 기 대표는 정부과천청사를 여의도에 있는 회사보다 더 많이 찾았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 사업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설명한 끝에 예산을 배정받는 데 성공했다.
부국증권 부사장에 오른 그는 50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모험에 도전했다. 증권사를 직접 경영하겠다는 꿈을 갖고 자본잠식의 위기에 빠진 코리아RB증권 인수에 나선 것이다. 기 대표가 인수를 결심한 2012년 당시 코스피지수는 큰 폭의 변동성을 보였고 국내 증권사 중 절반 이상은 적자 상태에 빠졌다. 기 대표 주변의 많은 사람이 사무실에 찾아와 증권사 인수를 만류할 정도였다.
그래도 뚝심 있게 기업금융과 채권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코리아RB증권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고 지금의 코리아에셋투자증권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지난 2년8개월 동안 철저히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영업을 펼쳤다. 기 대표는 "자본시장에서 소외받는 중소·벤처기업의 자금조달을 지원하는 전략을 통해 틈새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은 지난해(2014년 4월~2015년 3월) 기준으로 전년 대비 265.5% 늘어난 720억원의 영업수익(매출액)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128억원을 올리며 같은 기간 무려 753.3% 증가했다. 기 대표가 인수할 당시에 코리아RB증권이 11억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냈던 것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기 대표는 여전히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는 규모의 성장보다는 질적 발전을 통해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을 중소형 증권사의 '롤모델'로 만들고 싶어 한다. 기 대표는 "이제는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는 세상이 됐다"며 "사람과 현장에서 답을 구하고 금융제조업을 지향하는 증권사로 키워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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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 소외받는 중소·벤처 투자활성화 이끌 것" 지민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