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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시내에서 1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창싱다오 STX다롄. 매서운 보하이만의 겨울 날씨보다 더 매서운 파산의 현실이 STX다롄의 눈앞에 다가왔다.
산업은행 등 국내 채권단은 물론 중국 정부에도 STX다롄은 도려내야 하는 종양이 됐다. 한때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이 다롄을 살려야만 STX도 살수 있다며 집착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다롄시 정부조차 손을 떼고 싶어한다. 18기 3중전회 당시 STX다롄은 리커창 총리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경애하는 총리님, 다롄 창싱다오 STX다롄조선소를 기억하십니까. 이곳은 당신이 몸소 일으킨 곳인데 우리는 자치이(짠지)는커녕 죽 한 그릇도 못 먹을 지경입니다"라고 탄원이 올라오며 중국 정부를 압박했다.
주채권은행인 산은 입장도 다롄시 정부만큼 조급하다. STX다롄을 빨리 털어버리고 회생을 결정한 국내 계열사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청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STX다롄은 최악의 시나리오인 청산으로 정리가 되며 3조원짜리 조선ㆍ해양업체를 고스란히 중국에 헌납하게 됐다;
◇왜 청산인가=2조원에 가까운 돈을 투자한 STX와 달리 채권단이 STX다롄에 빌려준 돈은 4억달러 내외. 우리 돈으로 4,000억원 수준이다. STX 국내 계열사들이 지급보증한 약 7,500억원을 대신 물어주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채권단 입장에서는 STX조선의 국내 사업장을 STX다롄의 불확실성을 끊어낼 필요가 있다. 채권단이 중국 측에 STX다롄 청산 의사를 밝힌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산은의 한 관계자는 "STX다롄이 청산 과정을 밟으면 7,000억원 규모의 지급보증을 해소해줘야 하는데 이는 국내 은행이 신규자금 형식으로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청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체불임금이다. 하지만 이도 일정 부분 해소되고 있는 분위기다. 건조 중이던 15척 내외의 선박들이 완공되며 내부 하청을 맡았던 업체 근로자들의 임금 일부가 지급됐고 기자재ㆍ원자재 등을 매각해 일부 조선소 중국 근로자들의 임금을 지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측이 청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체불임금이다. 나빠질 대로 나빠진 다롄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청산 후 해양 부문이나 엔진 등의 설비를 일부 매각해 체불임금을 우선 해소한다는 게 다롄시 정부의 복안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산 어떻게 진행되나=중국 채권단은 한때 STX와 산은 등에 STX다롄 정상화를 위해 ▲중국 근로자의 임금체불 해소 ▲신규자금 지원시 지급보증 ▲국내 은행의 우선 담보권 중국 이양 등을 골자로 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제안은 익스포저 비율이 10% 초반에 불과한 우리 채권단이 수용하기에는 무리한 조건들이었다. 이 때부터 중국 측이 겉으로는 경영정상화를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STX다롄을 헐값에 가져가기 위해 꼼수를 펴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STX다롄이 복잡한 채권∙채무관계로 인수합병(M&A) 이점이 떨어지지만 청산 과정을 거쳐 이를 해소하고 나면 사실상 공짜로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STX그룹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중국 측은 리커창 현 총리가 랴오닝성 총서기 시절 유치한 STX다롄을 자기네들이 먼저 청산했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하고 우리 역시 3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들어간 STX다롄을 털고 나오는 데 대한 부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서 "청산이 불가피하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누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내느냐가 STX다롄 처리의 핵심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협력업체 야반도주 현실로=STX다롄이 청산될 경우 가장 큰 피해는 역시 협력업체다. STX와동반진출한 협력업체 중 일부는 밀린 임금을 해결하지 못하고 야반도주를 선택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협력업체들의 처리 문제는 계속 논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STX다롄의 각종 자산들이 경매절차를 거쳐 헐값에 중국 업체들에 넘어갈 공산이 크고 그나마 유입된 돈 역시 밀린 임금채권∙세금 등 우선변제권이 있는 채권을 상환하는 데 쓰일 것으로 예상된다. 3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해 잘 지어놓은 조선소를 중국에 바치고 나오는 셈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지에 진출해 있는 40~50개 국내 협력업체들의 생존 문제다. 중국 근로자들의 경우 중국 정부나 채권단이 구제대책을 세우겠지만 협력업체들은 우리 정부와 중국 정부 양 쪽으로부터 모두 외면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3월 공정 중단 이후 밀린 약 1,000억원의 매출채권은 실제 청산작업에 들어갈 경우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현지 국내 협력업체 중 몇 곳은 대표가 직원들의 급여를 주지 못해 한국으로 야반도주한 경우가 있고 길거리로 나앉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
STX다롄의 한 한국 협력업체 관계자는 "STX만 믿고 먼 이국 땅에 와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정이 파괴될 만큼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면서 "3조원이 넘는 신규자금이 지원되는 국내 사업장에 비하면 우리 업체들이 갖고 있는 매출채권은 소액에 불과하다.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민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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