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챌은 왜 망했나" 사장에 물었더니…
[CEO&Story] 전제완 유아짱 대표"영상 SNS '짱 라이브' 지구촌 소통문화로 자리잡을 것"
양철민기자 chopin@sed.co.kr
2년간의 감옥살이… 250억 빚더미… 프리챌 열풍 주역서 한순간 나락으로자신을 믿어주는 지인들과 다시 뭉쳐 36만원짜리 단칸방서 재기의꿈키워
전제완. 그는 한때 세상을 다 가진 듯했고 거침이 없었다. 지난 1999년 만든 프리챌은 가입자 800만명을 돌파하며 전국에 프리챌 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성공한 벤처인의 표상이 됐다.
하지만 3년 뒤 프리챌이 유료화를 선언하자 환호는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유료화에 반발한 가입자 이탈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출근하는 날 아침 그는 긴급 체포된다. 횡령과 배임혐의가 이유였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벌였던 일련의 일들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 벤처업계의 도덕적 해이를 뿌리 뽑겠다는 검찰의 의지도 크게 작용했다.
선장을 잃은 프리챌은 흔들렸다. 회사는 새롬기술에 넘어가고 그는 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남은 건 250억원의 빚. 프리챌의 빚을 모두 떠안은 탓이다. 그를 떠받들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등을 돌렸다.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삶을 놓아버릴 수도 있을 법했던 시기. 더 이상 추락할 것도 없는 바닥. 그를 끌어올린 건 사랑하는 두 아들과 자신을 믿어주는 몇 안 남은 지인이었다.
이를 꽉 다물었다. 재기라는 말이 사치로 보였던 시절, 그는 그 이상을 꿈꿨다. 이제 그 이상이 차츰 현실로 다가오는 듯 보인다. 새로운 날갯짓을 통해 이전보다 더 높은 하늘을 꿈꾸는 전제완(49ㆍ사진) 유아짱 대표는 "전세계를 스마트폰으로 묶을 생각"이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4년간 빚에 쫓기던 이가 맞나 싶다. 그의 호언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유아짱은 영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전문기업이다. 비밀병기는 '짱 라이브'다. 이용자 개개인이 생방송을 하면서 친구들과 채팅할 수 있는 신개념 SNS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동영상으로 이어주는 것. 쉽게 말해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결합이다. 개인이 동영상을 찍어 실시간으로 다수의 지인과 공유할 수 있으며 이를 두고 채팅도 가능하다. 살짝 의문이 든다. '페이스타임'으로 영상통화를 하거나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면 될 듯한 세상에서 굳이 이러한 소통방식이 필요할까.
전 대표는 기자의 의구심을 알아차렸는지 바로 짱 라이브를 작동시킨다. 전 대표의 아이패드에 찍힌 기자의 모습과 웃음소리가 지인들에게 동영상으로 전송된다. 그의 지인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며 기자에게 관심을 표하면서 이런저런 말이 오간다. 낯설 것 같았던 소통방식이 오히려 더 익숙하다. 왠지 흥미롭다.
"영상이란 활자와 달리 사람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에게 새로 산 옷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할 필요 없이 그저 카메라로 한번 비추면 되는 거지요. 스마트폰이 가진 갖가지 기능을 이용하는 것은 이제 시작이라고 봅니다. 영상을 통한 소통이 대세가 되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봅니다."
짱 라이브 가입자는 현재 110만명가량이다. 최근 들어서는 매일 1만명이 가입해 이용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그는 올해 가입자 2,000만명을 예상하고 있다. 조만간 미국이나 중국에도 출시해 세계인을 짱 라이브라는 앱을 통해 묶겠다는 계획이다. 전 대표의 표현대로라면 '인공위성 없는 지구촌(We're the world without satellite)'이 완성되는 것이다. 동영상으로 소통하는 세상. 그는 이것을 4세대 소통이라고 칭한다.
"최근 정보기술(IT) 역사는 10년 주기로 계속 바뀌어왔습니다. 스마트 기기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새로운 소통문화가 나올 타이밍입니다. 짱 라이브는 그러한 소통의 매체로 자리할 것입니다." 그의 어조에는 확신이 가득해 보인다. 아니 확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을 꿈꾸기는커녕 하루를 버티기도 버거웠을 그는 어떻게 미소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구구절절한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2004년에 출소하고 나니 모든 게 엉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웠지요. 그렇다고 과거에 매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과거가 아닌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비웠지요."
그는 감옥에서 수백권의 책을 읽으며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출소 후에는 IT 용역부터 컨설팅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250억원의 빚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두 아들을 중국에 있는 지인에게 보냈다.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하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자신을 추스르기도 버거운 현실의 무게 탓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2008년 1월 전 대표는 법원으로부터 250억원의 빚에 관해 파산면책을 받았다.
홀가분했다. 하지만 다시 원점이었다. 그때 그는 꾸준히 구상해온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보증금 1,000만원과 알음알음으로 모은 500만원을 가지고 2008년 9월 유아짱을 차렸다. 윤태중 유아짱 부사장을 비롯한 프리챌 초기 멤버 4명이 뭉쳐 사업을 시작했다. 다 전제완이라는 사람을 믿고 모인 이들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후 36만원짜리 방 한칸에서 지내는 생활이 계속됐지만 내일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다 보니 그를 믿은 독지가가 15억원을 선뜻 내놓았고 2010년에는 한 벤처투자사로부터 20억원의 투자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재기했다.
"재기요? 조금은 더 해야지요."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했던가. 누구보다 깊은 골에서 허우적거렸던 전 대표. 그의 넉넉한 웃음 뒤에는 더 높은 산을 향해 날갯짓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보인다. 날개도 없이 추락했던 전 대표이지만 지금은 든든한 두 아들과 지인들의 믿음이라는 바람을 타고 태양을 향해 나아갈 기세다.
● 전제완 대표는
▦1963년 강원도 강릉 ▦1987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89년 삼성물산 입사 ▦1991년 삼성물산 최우수사원 ▦1995년 자랑스러운 삼성인 ▦1999년 프리챌 대표 ▦2008년 유아짱 대표
지속성장 위해 '고급 서비스'로 네티즌 공략
■ 프리챌 유료화 강행 왜?
지난 2002년 10월. 프리챌은 가입자들에게 돈을 내라고 했다. 월 이용료는 3,000원. 요금은 커뮤니티 운영자에게만 부과되며 돈을 내면 아바타 할인 서비스 및 메일 용량확대 등의 부가서비스가 제공됐다. 이용자들의 반발은 엄청났고 누리꾼의 항의가 잇따랐다. 이후 프리챌은 가입자 및 이용률 감소로 고전하다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프리챌을 반면교사로 삼은 인터넷 업체들은 이후 다양한 수익 모델을 고안해냈으며 프리챌 유료화는 대표적 경영실패 사례로 꼽히고 있다.
프리챌은 왜 망했을까. 단지 유료화 때문인가. 전제완 대표는 이에 대해 프리챌 유료화는 실패한 모델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당연히 가입자들의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수십만개의 커뮤니티가 옮겨 가는 것도 예측범위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는 이러한 반발을 다 예상했음에도 왜 유료화를 밀어붙였을까. "당시 포털시장 구조는 독과점 형태로 고착되려는 시기였습니다. 2002년 포털 업계 1위를 다투던 네이버와 다음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라 본 것이지요. 이 때문에 조금 다른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그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방식을 고민하다 나온 방법이 바로 유료화였습니다."
전 대표는 인터넷시장의 경우 1위 사업자가 시장의 절반을 가져가고 2위 사업자가 나머지 절반의 반을 가지는 구조로 파악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3위 사업자였던 프리챌은 포털시장의 10% 남짓을 차지해 향후 지속적인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 이 때문에 그는 돈은 내더라도 고급 서비스를 원하는 네티즌을 공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전 대표는 단 10만명이라도 이러한 수익 모델에 동참할 경우 연간 6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낼 것으로 봤다. 실제 프리챌 유료화 모델에 동참한 커뮤니티는 2002년 당시 20만개 이상으로 전 대표의 예상보다 오히려 많았다. 프리챌은 유료화 모델 공개 이후 또 다른 서비스를 꾸준히 내놓아 새로운 이용자층 유입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유료화 발표 두 달 뒤 제가 긴급 체포됐다는 데 있습니다. 구상했던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당시 프리챌은 국내 통신사들과의 인수협상도 벌이고 있었으며 유료화 모델은 통신사들과 이미 협의가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대중의 인식과 달리 모든 게 치밀하게 고안된 전략하에 시행됐습니다."
만약 전 대표가 프리챌 대표직을 유지했다면 유료화 모델 도입이 조금은 다른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가장 궁금하고 아쉬운 이는 바로 전 대표일 테다.
"기술개발 자금 확보 위해 발품 팔아라"
■ 全대표가 말하는 벤처 성공조건
전제완 대표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아왔다. 지난 1987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9년에는 삼성물산에 입사해 인사팀에서 일했다. 당시 베이직(BASIC) 및 C언어 같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며 삼성그룹의 인사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덕분에 1995년에는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에 선정됐으며 이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인사팀에 근무하는 등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1999년에는 프리챌을 창업하며 기세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2000년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그 또한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2002년 횡령혐의로 구속된 후 그는 국내에서 벤처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였지요. 대기업에 있으면 모든 업무가 체계적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자기 일만 잘하면 됩니다. 하지만 벤처는 다르지요. 모든 것을 맨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벤처의 '피'라고 할 수 있는 돈이 없으면 기술개발을 할 사람을 불러 모으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경영학은 오너를 위한 학문이지 벤처인들에게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고 못박는다. 그가 유아짱을 통해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기술개발에 쏟는 열의만큼 자금확보를 위해서도 열심히 발품을 팔았기 때문이다.
전 대표는 정부와 사회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비상장사의 경우 대표가 무한책임을 지는 구조입니다.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구조지요. 이러한 구조가 바뀌어야 대기업으로 향하는 젊은 인재들을 벤처로 끌어 모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역경을 겪고 현재 패자부활전을 치르고 있는 그의 말에서 웬만한 경영학 서적보다 더 큰 울림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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