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노트'라는 클라우드 기반의 메모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이 앱을 만든 필 리빈 에버노트 최고경영자(CEO)는 서비스 초기 자금난에 시달리다 못해 서비스를 중단하기로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비스 폐쇄 전날, 독일에서 날아든 e메일 한 통이 에버노트를 살렸다. 열렬한 에버노트 이용자 한 사람이 "자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한 것. 수년이 지난 지금 에버노트는 전세계 3,000만명 이상이 쓰고 있는 인기 앱이다. 이제는 메모 서비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덧붙여가며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 21일 광화문에서 열린 '에버노트 비즈니스 콘퍼런스'에서 만난 리빈 CEO는 "우리는 시장조사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서비스를 만든다. 우리 스스로가 타깃 유저(Target user)이기 때문"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불행히도 국내에서는 리빈 같은 경험의 소유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위기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투자자가 등장하는 일은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깝고, 좋은 아이디어만 가지고도 투자 유치가 가능한 해외의 정보기술(IT) 생태계 역시 말 그대로 바다 건너의 이야기다. 이 때문에 요즘 개발자들은 해외 시장부터 먼저 공략한다.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우리나라의 작은 시장 규모를 감안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 아무리 잘해봐야 살아남기 힘든 탓도 있다.
결국 문제는 투자다. 다행히 최근 들어 벤처 투자사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데다 투자자와 개발자를 이어주는 모임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돈은 많은데 위험을 꺼려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게다가 이 같은 분위기는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다. 캄보디아 고무농장, 몽골 광산, 중국 부동산 등 사기꾼들이 광고한 '현물'에는 통 크게 베팅한 자산가들을 보면 우리나라에 온통 투자처를 찾는 돈이 넘쳐나는 것 같지만, 유독 IT 분야만은 황량하다. 한술 더 떠 '앱 하나로 무슨 돈을 버느냐'는 보수적인 시선도 여전하다. 창의성이 유일한 무기인 젊은 벤처들에는 불행한 환경일 수밖에 없다. 정부와 업계와 소비자가 한꺼번에 업그레이드돼야 하는 문제인 만큼 뾰족한 답도 없다. 앞으로 '자력갱생'에 성공할 벤처들이 지난날의 경험을 살려 더 나은 IT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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