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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 Life] 강형구 화백

상업적으로 성공 못하더라도 호기심 잃지않는 작가 되고싶어



법조인 부친 반대 불구 미대 갔지만 결혼과 함께 직장생활하며 붓 놓아
예술 갈증에 마흔넘어 다시 돌아와 화랑 운영하면서 집 한채값 큰 손해
희망 포기 않고 10년간 작품 몰두 지금은 세계적 블루칩 작가 반열에


"퇴직금을 모두 투자해 운영하던 화랑이 망하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방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어느 날이었어요. 충청도 어느 휴게소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조용필씨의 노래가 들리더군요. 저 또한 짐승의 썩은 고기만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가 아니라 산 정상 높이 올라갔다가 굶어서 얼어 죽더라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살고 싶었어요.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이렇게 부질없이 살다 갈 수는 없다며 가사를 수십 번 되새기는데 가슴 깊은 곳까지 먹먹해지더군요. 가사에 담긴 대로 21세기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마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화가 한 사람이 있다. 국내보다 해외 미술 시장에서 훨씬 호평받는 강형구(59ㆍ사진) 화백이다. 대법관까지 지낸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대에 진학했지만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면서 예술을 포기했다. 하지만 끝끝내 예술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붓을 잡았고 53세의 나이에 작품이란 것을 팔아봤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적인 경매회사인 크리스티 경매에서 작품 하나에 수억원을 호가하며 내로라하는 '블루칩 작가'로 우뚝 섰다.

◇작품은 8할이 '작(作)'에서 나온다=강 화백의 부친은 검사 출신으로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낸 고(故) 강우영 선생이다. 2남 2녀 중 장남이었던 강 화백은 법조인 집안에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강 화백은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가 바뀔 때마다 가족들을 따라 전학을 여러 번 했다고 회고한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세 번, 중학교 때 두 번 전학했는데 전라도와 경상도, 서울을 오가며 전학하니 아이들이 많이 놀렸어요. 제 외모가 다소 서구적으로 생긴 데가 다른 지역의 말을 쓰니까 애들이 저를 혼혈아로 보고 '형구 아버지는 톰 중사'라며 많이 놀렸어요."

또래의 짓궂은 장난에 그가 크게 상처 받지 않았던 것은 비장의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화책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당시 이야기를 지어내 창작 만화를 그려 실로 엮어 책으로 만들었는데 원본의 복사본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학창 시절 그가 그린 작품 중 최고로 꼽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성문종합영어 상단 모퉁이 페이지마다 그렸던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특히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것. 친구가 수업 시간에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압수당하며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구성해 만화책을 완성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지 물었다. "전학 가서 처음에 왕따 당할 때는 학교를 가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그 시간만큼은 공상을 즐기는 거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고 그림으로 그려보면서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갔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의 시간'이 누적될수록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작품(作品)'의 의미를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작'이 그려질 목표에 대한 정신적 배경이나 마인드, 혹은 아이디어라면 '품'은 작에 대한 실천 행위가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의 8할은 '작'에서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예술가의 길 VS 직장인의 길=대학 진학을 앞두고 강 화백은 화가가 되는 길과 군인이 되는 길 두 가지 인생 행로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예술가의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지만 부모님의 반대에다 고된 인생살이가 큰 고민이었다. 군인의 길은 직업적으로 안정된 데다 (어차피 법대 진학이 어려웠으니) 부모님한테도 어느 정도 심리적 보상이 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현실적인 선택을 하기로 결정한 강 화백은 자신을 지도하던 고등학교 미술부 교사에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술부 교사와 미술부 선후배들이 육사 시험장까지 따라와 미술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설득했고 강 화백은 예술가의 길을 운명적으로 걷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중앙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교수와 제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이 작용하는 미대에서 그의 반골 기질은 자주 드러났다. 그가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결혼이었다. 대학 시절 뜨겁게 연애하던 동갑내기 여자친구(지금의 부인)가 졸업하자 결혼해야 하는 압박을 크게 느꼈고 결국 본가와 처가에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결혼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군 복무 중인 1977년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고 나서 그는 1980년 졸업과 함께 서울농약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미술을 전공했으니 관련된 직장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제대로 된 회사의 기획실에 들어가 일을 확실히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9년 동안 공무원 접대를 비롯해 원자재 수입을 위한 신용장 개설, 제품 원가 계산 등 기획실 업무를 두루 거쳤습니다. 특히 반골 기질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없어지지 않아 윗분들한테 입바른 소리를 많이 했더니 제 별명이 '강대리만족'이었어요."(웃음)

◇포기할 수 없는 예술의 꿈, 그리고 희망=하지만 오랜 직장생활은 그의 예술에 대한 갈증을 키우기만 했다. 결국 10년 가까이 근무하던 서울농약을 그만 두고 혜화동에 화랑을 차렸다.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기획전을 열었으나 '장사'답게 하지 못해 4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집 한 채 값이 족히 넘을 만큼 손해를 봤지만 그 손해를 메우기 위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자 했던 그가 선택한 것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붓을 놓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였다. 마흔을 넘은 나이에 경기도 분당에 있는 지하 작업실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면서 200호(259×194㎝)짜리 대형 작품 수백 점을 그렸다.

"난방도 안되는 지하 작업실에서 에어브러시와 동고동락하며 10여년을 지냈습니다. 주변에선 작품을 하나라도 팔라는 조언이 쏟아졌지만 저 스스로 만족할만한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는 어떤 작품도 팔지 않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래서 당시 제 별명이 '팔포(팔기를 포기한 작가)'였어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용수철이 튀려면 눌려져 있어야 합니다. 직장생활은 제가 마치 용수철처럼 눌려져 있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시기의 응축된 예술에 대한 욕망이 현실의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예술을 놓지 않도록 잡아줬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는 이름 세 글자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다. 특히 2007년 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 블루'가 457만홍콩달러(7억6,000만원)에 팔린 것을 시작으로 정가보다 4~6배 비싼 가격으로 국내외 컬렉터들에게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성공의 반열에 오른 강 화백, 그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을까. "무엇보다 영혼이 자유스러운 화가가 되고 싶어요.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해보고 싶습니다. 설사 상업적으로 팔리지 않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소년의 호기심을 잃지 않는 진정한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He is…



▲1954년 부산

▲1980년 중앙대 예술대 서양화과

▲1980~1988년 서울농약주식회사 기획실 근무



▲1988~1990년 화랑 운영

▲1990~2000년 경기도 분당에서 작업에 몰두

▲2001년 예술의전당 개인전

▲2002년 세종문화회관 개인전

▲2004년 제5회 광주비엔날레 단체전 '코리아 익스프레스(Korea Express)'전

▲2007년 아라리오갤러리 천안개인전

▲2009년 아라리오갤러리 뉴욕ㆍ서울개인전

▲2011년 싱가포르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2012년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 단체전 '코리안 아이(Korean Eye)'전, 싱가포르 미즈마갤러리 개인전

▲2013년 아라리오갤러리ㆍ영은미술관 개인전


인물 내면·시대상 각인된 극사실주의 초상 만나보세요
신작 볼 수 있는 전시회 잇따라 열어




극사실적 초상화로 유명한 강형구 화백의 전시는 국내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해외 전시 행사, 작품 활동으로 워낙 일정이 빡빡하기 때문이다. 강 화백의 최근작과 미공개작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동시에 두 곳에서 열려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 화백이 초상화라는 장르로 시대상을 표현한 신작 13점과 드로잉 30여점을 '각인(刻印)'이라는 제목으로 오는 12월20일까지 서울 청담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선보인다. 지난 2011년 싱가포르 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대규모 개인전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과거와 현재, 서구와 동양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인물의 작품들과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조각 작품 3점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작가는 빈센트 반 고흐, 오드리 헵번, 메릴린 먼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의 얼굴을 알루미늄판 위에 에어브러시ㆍ못ㆍ드릴ㆍ이쑤시개 등 날카로운 도구로 긁는 방식으로 세밀하게 그려왔다.

그의 기존 작업이 유명 인물의 초상을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번 출품작들은 특정 인물에 각인된 시대성이나 본질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 결과물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조선시대 화가 윤두서의 자화상을 재해석한 '윤두서의 초상'으로 얼굴과 수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원작의 느낌을 살려 작가 자신의 대형 초상화와 나란히 선보인다. 또한 고흐, 레오나르도 다빈치, 헵번, 마일즈 데이비스 등 유명인들의 극사실적 초상화 신작도 만날 수 있다.

강 화백의 특별초대전 'I SEE YOU'는 12월15일까지 경기도 광주의 영은미술관 1·2전시실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최근 2~3년 동안 영은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한 국내 미공개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의 전매특허인 '얼굴 속의 내면'과 함께 '얼굴의 다양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기존 작품들이 인물 자체가 중심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4m가 넘는 '전신상'도 선보였다. 1전시실은 극사실적 섬세함을 머금고 있는 천, 알루미늄, 아크릴 캔버스 속 얼굴과 전신상 작품들로 구성됐다. 2전시실 공간에서는 30여점의 캐리커처 드로잉 및 조각 작품들을 선보인다.

한편 그의 작품은 영국의 프랭크코헨컬렉션, 미국의 지미카터센터, 미국의 PEAK6 인베스트먼트, 광주시립미술관, 포스텍, 잠실올림픽 주경기장 등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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