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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나라다.
부유층의 상징이라는 요트 보유자가 국민 7명당 1명꼴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부국이다. 하지만 겨울 날씨가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음산해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6위에 달한다. 현지에서 결혼의 한 형태로 인정받는 동거까지 포함해 평생 동안 배우자를 평균 일곱 번이나 바꿀 정도로 국민 기질이 개방적이다.
이처럼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이질적인 스웨덴은 지난 2007년 참여정부가 스웨덴 모델을 벤치마킹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비전 2030'을 내놓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보편적 복지'라는 사회적 이상을 '대기업 중심의 성장'이라는 다소 모순된 전략을 통해 뿌리내리는 데 성공한 스웨덴 모델은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었다.
한동안 거의 잊혀졌던 스웨덴 모델은 최근 내년 대선을 앞두고 복지 논쟁이 가열되면서 또다시 국내에서 관심사가 되고 있다. 2007년 우파정권 집권 이후 복지병에 걸린 스웨덴을 전면 수술하고 있다는 게 주요 논지다.
하지만 개혁 정책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스웨덴 언론이 지적하듯 지속 가능한 복지를 위해 일부 비효율적인 요소를 손질한 것에 불과할 뿐 복지 체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스웨덴이 복지 국가라는 울창한 나무에서 썩은 가지를 몇 개 쳤다고 우리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가지들을 모두 쳐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스웨덴 경제위기 때 복지 틀 갖춰
사회ㆍ문화적인 토대가 전혀 다른 스웨덴 모델을 국내에 이식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하나 더 짚고 넘어갈 점은 스웨덴의 복지 국가 체계는 1930년대 초 경제 공황으로 국민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됐다는 것이다. 미국 역시 퇴직연금이나 실험보험 등 사회보장제도의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시점이 대공황 때였다. 우리나라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여러 복지제도가 확충됐다.
이처럼 사회안전망이 갖춰지는 시기는 경기 호황 때가 아니라 경기 침체로 국민이 살기 어려워질 때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경제 위기이니 성장에 집중할 때'라는 논리를 내세워 분출하고 있는 복지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몰아치는 시도는 대국민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세 부담률이나 국민 부담률,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예산 등 어느 지표를 들이밀더라도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스웨덴 모델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복지 체계 구축 과정에서 대기업이 수동적으로 끌려다닌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성장이 일정 단계에 올라갔는데 분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성장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대기업과 부유층이 복지 담론을 주도해야 할 때다. 복지와 분배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게 아니라 과연 우리나라에 미국식과 유럽 대륙식, 북유럽 모델 가운데 어느 게 적합한지, 이도 저도 아니면 한국형 모델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지 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기업·부유층이 양극화 해법 주도를
분노한 '99%'에 대해 '당신들이 가난한 게 어디 내 책임이냐' '세금은 우리가 거의 다 낸다'라는 식으로 반응해서는 갈등의 골만 깊어질 게 뻔하다. 지금은 바로 '1%'가 눈앞의 이익에 매몰될 게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와 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극화 문제에 대한 진지한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99%의 분노가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갈 경우 바로 1%가 가장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특히 올해는 대선ㆍ총선과 맞물려 1%에 대한 99%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 99%가 지난해 분노한 시위자에 불과했다면 올해는 정권의 향방과 사회 체제의 성격을 좌우할 수 있는 유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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