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변호사로 활동하며 고국과 인연
글로벌 '주가 경쟁' 피할 수 없는 시대
기업도 투자자 이익 증대 힘써야
은퇴 후 공익 기구·학계로 돌아가
북한 재개발 사업 등 돕고 싶어
"저는 운이 참 좋습니다."
변호사, 증권사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2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벌 금융사 베어링자산운용 한국법인을 맡고 있는 곽태선(55·사진) 대표는 모든 걸 운으로 돌렸다. 하지만 변화의 연속이었던 곽 대표의 인생을 그저 운으로 표현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지난 1971년 12월25일 13세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 순간부터 곽 대표의 인생은 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치열함의 연속이었다.
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가 역사를 좋아하듯 베어링 또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베어링과 한국의 인연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지난 1762년 설립된 베어링은 18세기 말 해외에서 생산된 상품을 사들여 영국에 판매하는 등 상거래 활동에 집중했다. 이후 상업용 계좌를 통해 상품매매와 대금지불 및 수금, 보험 및 선적 업무도 처리했다. 19세기에는 철도산업 발전을 위한 자금조달에도 깊이 관여했다. 특히 미국·러시아·캐나다·아르헨티나·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철도 건설에 필요한 철도채권 발행 주간사로 활발히 활동했다. 20세기 초에는 아시아 철도와의 연계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아시아 철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윌리엄 비셋경을 현장에 파견하기도 했다. 1900년대 초 당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를 조사했던 비셋경은 경부선 철도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서울과 부산 사이의 여러 도시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노선과 터널 위치까지 그려놓은 지도를 작성했다.
곽 대표는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베어링은 철도를 운영해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협상을 시작했다"며 "당시 베어링은 HSBC와 손잡고 경부선 개발을 위해 발행한 무담보채권 매입 협상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일본 정부가 이의를 제기해 매각작업은 중단됐다.
이후 1980년대 한국 시장의 높은 잠재력을 파악한 베어링은 국내에서 자본시장 거래 주간사 및 인수자로서 전통적인 투자은행 역할을 했다. 1986년에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서울에 대표사무소를 열기도 했다. 한국국제신탁·서울국제신탁·쌍용투자증권과 한국유럽펀드 주간사를 하며 베어링은 전문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들 투자신탁은 외국인 투자가들이 시장개혁 초창기에 한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당시 베어링은 한국 시장에 대한 모든 해외투자의 10%를 담당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1981년부터 1990년까지 베어링은 외국계 투자은행 가운데 한국 주식 발행 점유율이 가장 높았다.
수많은 경쟁사와 차별화될 수 있었던 베어링의 경쟁력은 우수한 리서치 역량이었다. 곽 대표도 당시 베어링에서 한국 관련 리서치를 담당하며 한국 시장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으로 해외 투자가들에 한국의 성장성을 보여줬다.
곽 대표는 "베어링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 누구보다 빨리 진출했고 아프리카에도 최초로 들어가는 등 도전과 모험 정신이 높다"며 "이러한 베어링 정신을 이어받아 어떠한 환경이 닥쳐도 베어링만의 관점으로 국내 투자자들의 자산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1762년 설립해 전세계 진출… 우수한 리서치 역량이 강점 ■ 베어링자산운용은 곽 대표는 "올바른 판결을 하려면 정확하고 객관적인 팩트가 필요하다"며 "법학 수업 대부분도 팩트가 무엇이냐가 중심이었고 이러한 습관은 결국 투자자들의 자산을 운용할 때도 객관적 시각으로 다가서게 해줬다"고 말했다. 역사 전공 또한 도움을 줬다. 그는 "앞을 보기 위해서는 뒤를 많이 봐야 한다"며 "거대한 사이클로 진행돼온 금융시장도 크게 보려면 역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역사를 보면 항상 인류는 발전을 거듭해왔다"며 "이러한 생각으로 어떠한 일도 낙관적이고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팩트를 중시하고 역사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는 안목 덕분이었을까. 곽 대표는 한국 자본시장에 최초로 배당주펀드를 들여온 인물로 기록된다. 2002년 처음 도입할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의 펀드였지만 지금은 국내 자본시장 최고 상품으로 각광 받으며 곽 대표의 탁월한 안목을 입증하고 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곽 대표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껴 기업전문 변호사를 선택했다. 미국에서 기업전문 변호사 생활을 하다 홍콩으로 영역을 넓힌 곽 대표는 산업은행 차입 문제나 한국 최초로 국내 기업의 중국 합작공장 설립건 등을 다루면서 한국과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기업담당 변호사로 5년 이상 승승장구하던 권 대표는 또 한번 변환점을 맞는다. 곽 대표는 "기업담당 변호사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아쉬움이 많았다"라며 "영화로 치면 인생에서 주연은 아니더라도 조연 정도는 해야 하는데 기업 변호사는 중요한 일은 하지만 항상 뒷전에 머물러 있는 엑스트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귀띔했다. 변호사 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쯤 영국 베어링증권으로부터 한국지사에서 일해달라는 러브콜을 받았다. 기업전문 변호사로서 경제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증권업무를 하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한 곽 대표는 베어링증권 도쿄지사에서 3개월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 대학시절 영어를 정복하기 위해 영어사전을 들고 책과 씨름했던 그는 이제 어려운 증권용어와 특히 생소했던 한문을 배우기 위해 경제신문과 옥편을 찾아가며 공부를 해나갔다. 곽 대표는 "증권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했던 일은 리서치였다"며 "당시 국내에 개념이 없었던 기업탐방을 처음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정확한 보고서를 내 해외 투자가들에 한국 기업을 소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후 세이에셋코리아 창업 파트너로서 본격적으로 증권업무에 뛰어들었다. 이후 지난해 베어링자산운용이 세이에셋코리아를 인수하고 곽 대표를 한국법인 총괄 대표이사로 임명하면서 다시 베어링과 인연을 맺었다. 변호사와 증권업무는 다르지 않으냐는 질문에 곽 대표는 "금융업무도 법처럼 팩트가 중요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기업담당 변호사와 같은 성격의 일"이라며 "우리가 먼저 긴장하고 서두르면 실수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후자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변호사와 같은 냉정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러한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대형 손실 없이 고객들의 자산을 지켜왔다"며 "유행 따라 상품을 쉽게 내놓지 않았고 철저한 리서치로 한발 앞선 상품들을 출시해 절대수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곽 대표는 앞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아시아 시장이 1980~1990년대에는 무조건 성장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질적 성장을 우선시하고 있다"며 "중국도 시스템 개혁과 부패척결에 나서고 있고 아베노믹스·모디노믹스·초이노믹스 등 아시아 시장 전체가 리폼 물결에 휩싸이고 있어 가치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곽 대표는 국내 기업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제 국내 투자자들은 단순히 애국심만으로 국내 기업의 주식을 사지 않는다"며 "투자자들은 국내 기업만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과도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기업이 이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국내 기업들도 단순히 물건만 잘 만들어 팔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가 같은 기업가치의 매력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며 "글로벌화된 시장에서 이제 주가도 글로벌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곽 대표는 은퇴 이후 기업보다 공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통일시대를 대비해 북한 재개발 사업 등에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곽 대표는 "금융업무를 시작한 곳이 베어링이니만큼 마지막도 베어링에서 마치고 싶다"며 "이후에는 유엔이나 적십자·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공익기구나 학계로 돌아가 통일 이후 북한의 재개발 사업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
■ 곽태선 대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