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용기를 타고 코네티컷주에 위치한 부동산 억만장자 리처드 리치먼의 1,000만달러짜리 저택으로 날아갔다. 그는 3만2,000달러씩 내고 만찬에 참가한 '최상위 0.1%'의 부자들을 모아놓고 미 중산층 복원이라는 뜬금없는 주제를 역설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행사 전날 "공화당은 억만장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며 비난하는 e메일을 이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올 10월 중순 네바다주립대 연설에서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학생들이 고통받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가 한 시간 남짓한 강연으로 받은 돈은 무려 22만5,000달러였다. 분노한 네바다주립대 학생회는 "대학이 마구잡이로 기금을 쓰는 바람에 등록금이 급등하고 있다"며 클린턴 전 장관 측에 강연료 반환을 요구했다.
다소 코미디 같지만 미 정치권이 얼마나 금권정치에 물들어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미 선거에서 정치자금 동원력과 당선 가능성은 거의 정비례한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의 승리에는 풀뿌리 시민운동과 소액기부도 큰 몫을 했지만 주된 돈줄은 월가나 부유층이었다. 공화당 극우 세력인 '티 파티'도 대중들 앞에서는 월가를 욕하지만 걸핏하면 월가로 날아가 정치자금을 구걸한다.
'금권선거의 전조'라는 비판이 쏟아진 11월4일 중간선거에서 정치자금 상위 20명의 기부자 가운데 15명은 친공화당 성향이었다.
소선거구제 탓에 금권정치 물들어
이들이 부자 증세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지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5명은 왜 민주당에 정치자금을 지원했을까. 자산이 350억달러로 미국 내 8위 부자인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답을 제시해준다.
그는 이번 중간선거에서 이민자 수용, 총기 규제, 교육 개혁 등 민주당 어젠다 지원에 4,000만달러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는 뉴욕시장 재임 때 월가 금융기관들의 세금을 깎아줘 '월가의 치어리더'라는 비아냥을 들은 전력에서 드러나듯 부유층 증세는 극구 반대한다. 일부 최상위 부자들도 개인적 신념을 위해 민주당 편을 들지만 워런 버핏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빈부격차 해결에는 소극적인 셈이다. 민주당조차 이들 큰손들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미 정치는 왜 이렇게 돈에 흠뻑 젖게 된 것일까. 우선 미국의 정당 시스템이 의외로 허약하다는 점이다. 승자독식인 소선거구제에서 승리하려면 정치 성향이 어정쩡한 부동층을 집중공략해야 하고 빈곤층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비례투표를 접목한 유럽 선진국들이 여러 계층의 입맛에 맞는 전국적인 공약을 내놓아야 의석수를 늘릴 수 있는 것과 대조된다. 또 선거 주기가 2년이다 보니 당선자들은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또 돈을 모으러 돌아다녀야 한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의 시대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은 1930년대 뉴딜 정책을 시작으로 국가 인프라 구축, 빈곤층 해소와 인종차별 철폐, 베트남 전쟁, 1980년대 '강한 미국' 건설 등 시대적 과제를 놓고 고군분투했다. 이 같은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서 미 선거는 고만고만한 정책 차별화보다는 정치 광고를 통한 상대 후보 흠집내기로 전락했다. 냉소주의에 빠진 일반 미국인들은 정치를 외면하고 있고 이는 다시 금권정치의 길을 확장시키고 있다.
'기회의 균등' 美 핵심가치 퇴색
부유층의 돈줄이 정치 생명을 좌우하는 판국에 미 정치권이 일반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심지어 일부 정치학자들이 '금권정치 포퓰리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낼 정도다. 통상 포퓰리즘은 선심성 정책을 남발해 일반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다는 뜻인데 미 정치권은 부자들에게 아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의 금권정치는 100년래 최악이라는 빈부격차 해소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 요인이다. 물론 미국은 천문학적 재정적자, 군사력 퇴조 등 각종 위협 요인에도 상당 기간 세계 최대 강국으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미 정치권이 돈의 늪에서 빠지면서 과거 황금시대와 경제적 역동성을 가능하게 했던 기회의 균등이라는 미국의 핵심 가치가 점점 퇴색하고 있는 것도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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