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선 세월호 참사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철학도 심연(深淵)으로 빠져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정부 출범 당시 '국민안전' '국민과의 신뢰(소통)' '책임행정' 등을 대표 브랜드로 내세우며 대한민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겠다고 국민들에게 굳게 약속했지만 지난 2월 경주 리조트 사태에 이어 세월호 참사로 이 같은 국정철학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에 처해 있다.
60% 후반에 달하는 높은 국정운영 지지율을 기반으로 경제 활성화, 공기업 개혁, 규제혁신, 비정상화의 정상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축 등 굵직한 국정과제 수행에 탄력을 받아야 할 시점이지만 세월호 사태로 풍선에 바람 빠지듯 국정운영 동력이 가파르게 상실되고 있다.
◇헛구호에 그친 국민안전=박 대통령은 행정안전부 명칭을 안전행정부로 변경하는 등 국민안전에 국정운영의 무게중심을 두었지만 경주 리조트 사태가 발생한 지 채 두 달 만에 여객선 세월호 사태가 터지면서 '국민안전' 정부라는 이름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박 대통령은 경주 리조트 사태가 터진 다음날(2월18일)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신학기를 앞두고 신입생 환영회 등 많은 행사가 예상된다"면서 "학생 집단연수에 대한 안전 긴급점검을 해달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했지만 두 달 만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국무회의에서 "안전위험이 있는 현장에는 안전수칙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라며 "각 부처가 지금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수칙들이 잘 부합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철저하게 감독을 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세월호 사태에서는 선장이 탑승객을 뒤로하고 먼저 배에서 도망치는 등 안전수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재난당국의 철저한 감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개별 부처가 박 대통령의 안전사고 지시사항을 건성으로 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국민불신 부른 '잘못된 소통'=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정책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누차 강조했지만 일선 부처에서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정책을 올바르게 알리고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해 먼저 공개해야 한다고 지침을 내렸지만 이번 세월호 사태에서 여실히 나타난 것처럼 실종자 가족들은 정보부족과 왜곡에 시달려야 했다. 실종자가 구조자 명단에 수일간 게재돼 가족들의 공분을 샀고 탑승자와 실종자 수를 놓고서는 정부 부처 간 조율되지 않은 발표로 국민들의 혼란과 불신을 자초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오죽하면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는 믿지 못하겠으니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울부짖었겠느냐"면서 "정부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 '가짜 소통'을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고위 공무원들의 처신도 국민들의 불신을 키웠다. 누구보다 실종자 구조와 사태수습에 열정적이고 책임감 있게 나서야 하는 주체가 공무원이지만 이들은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은 발언과 행동으로 불신의 골을 오히려 깊게 했다. "기념사진을 찍자"는 고위관료의 성숙되지 못한 발언, 가슴이 타 들어가는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교육부 장관, 사고수습 책임을 놓고 서로 떠넘기기를 반복하는 고위공무원들의 행태를 보면서 국민들은 절망했고 분노했다.
◇사라진 책임행정=박 대통령은 장관들이 스스로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부처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실상 고위공무원들은 대통령의 지시와 명령이 있어야 움직이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2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가 공무원은 어려움에 빠진 국민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줘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는 당사자들"이라며 "자리보전을 위해 눈치만 보는 공무원은 우리 정부에서 반드시 퇴출시킬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책임행정이 사라진 현실을 따끔하게 질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세월호 침몰 이후 주무 부처인 안행부와 해양수산부는 협업을 통해 업무처리를 하기보다는 정책 혼선을 자초하며 책임 떠넘기기를 반복하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다. 안행부는 특히 사고 초기 안이한 상황판단과 잘못된 보고로 청와대의 판단 미스를 가져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규제완화 등 핵심 국정과제 추동력 약화=세월호 사태로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이 바뀔 가능성도 높다. 박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규제개혁 작업은 세월호 사태로 추진동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여권 관계자는 "규제개혁을 비롯해 핵심 국정과제들이 추진과정에서 동력을 잃을 우려가 있다"면서 "공무원 사회의 문화를 개조하는 방식으로 이 같은 난국을 헤쳐나가는 방안이 강구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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