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br>리살공원·인트라무로스 요새 등 도심 곳곳 400년 통치·저항 흔적<br>호텔·카지노 갖춘 '리조트 월드'엔 자립하려는 필리피노들의 의지가…
| 마닐라 공항 인근의 '리조트 월드 마닐라'는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6성급 호텔을 표방한 맥심 호텔에서는 카지노·쇼핑·공연 등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고 최첨단 시설에서는 마닐라의 미래를 느껴볼 수 있다. /사진제공=리조트월드마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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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이 16세기 마닐라를 지배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 '인트라무로스'. /사진제공=필리핀관광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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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조트월드마닐라의 맥심호텔에서는 매일 다양한 쇼와 콘서트가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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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의 젖줄인 파식강 너머로 도심의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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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19년 8월 스페인 세비야를 출발한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잔잔한 대양을 마주했다. 평온한 바다를 바라보며 기쁜 마음에 '태평양(太平洋)'이라고 이름 지었다. 마젤란의 기쁨과 달리 태평양은 재앙이었다. 바다는 끝없이 이어졌고 질병과 굶주림으로 선원 수는 계속 줄었다. 무모한 도전이 헛되이 끝나갈 무렵 그는 희망의 땅을 발견한다. 바로 필리핀이었다. 인도네시아 일대 몰루카 제도를 다녀온 적이 있던 그는 경도를 기준으로 세계일주에 성공했다는 평가까지 얻게 된다. 역사적 위업을 남겼지만 정복자의 본성은 화를 불렀다. 그는 세부의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등 필리핀에 스페인 문화를 주입하려다 막탄의 추장 라푸라푸에게 습격 받아 목숨을 잃는다.
필리핀과 스페인의 애증(愛憎)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필리핀은 전역이 스페인의 영향권에 흡수되며 동서양 혼혈 문화가 뿌리내렸다. 특히 수도 마닐라는 라틴 아메리카만큼 스페인 문화의 밀도가 높다. 보라카이나 엘니도 등 필리핀 휴양지에서 느낄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서려 있다.
◇400년 스페인 식민지의 풍경=전철로 UN애비뉴역에 내리면 넓은 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19세기 스페인 식민 지배에 저항한 필리핀의 독립 영웅 호세 리살을 추모해 대규모로 조성된 공원이다. 인텔리 출신인 리살은 폭동 공모죄로 이곳에서 처형됐다. 필리핀의 슬픔을 간직한 이 장소에서는 최근 다시 비극이 발생했다. 지난 8월 필리핀의 전직 경찰관이 관광버스에 탄 25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여 8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억울하게 경찰에서 해직당했다며 복직을 요구하다 벌인 참사였다.
마닐라에서 만난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순박하고 친절했지만 스페인 문화의 기질적인 특성이 남아 있다. 열정적이고 다혈질이다. 머물던 호텔에서 전해들은 한 직원의 일화는 '열정'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중국 투숙객이 새벽에 죽염을 요청하자 시내를 돌아다녀 구해줬다고 한다. 열정은 필리핀인에게 분명 양날의 검이다. 친절함과 적극성이기도 하지만 과격과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리살공원을 지나면 스페인이 건설한 요새 '인트라무로스'를 만날 수 있다. '인트라무로스'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다른 도심과 구분되는 지역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성벽 안을 통과하면 스페인 식민 시대 부유층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카사마닐라'가 눈에 들어온다.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스페인의 화려한 분수대와 더불어 석조 정원, 식탁, 장식장 등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물품들이 잘 보관돼 있다.
카사마닐라를 지나면 16세기 군사적 요충지였던 '산티아고 요새'가 등장한다. 세계 2차대전 당시 화재로 대부분 소실된 산티아고 요새는 이후 복원돼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요새 내부에는 감옥ㆍ고문실 등 당시 스페인군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는 시설물들이 있다.
◇라스베이거스를 꿈꾸는 도시='필리피노(Filipinoㆍ필리핀 사람을 일컫는 말)'는 스페인인처럼 나이트클럽ㆍ카지노 같은 환락산업에 대한 거부감이 덜 하다. 세부와 달리 마닐라에서는 휘황찬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콩의 스타크루즈사와 필리핀의 AGI가 합작해 마닐라 공항 인근에 세운 대규모 유락시설 '리조트 월드 마닐라'는 '리틀 라스베이거스'와 다름 없었다.
6성급 호텔을 표방하며 올해 문을 연 리조트 월드의 맥심 호텔은 스페인의 흔적을 지우고 자립을 일구려는 필리피노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1960년대 호황을 누렸던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리는 라스베이거스형 모델은 필리피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지도 모른다.
최근 위용을 드러낸 필리핀 최고급의 맥심 호텔은 '라스베이거스의 자랑' 윈호텔과 닮은 꼴이다. 호텔 로비 구조와 객실은 윈을 본따 배치됐다. 호텔과 이어진 쇼핑센터는 '라스베이거스의 명물' 베네치안호텔처럼 인공 하늘로 천장이 꾸며졌다. 열대성 강우(스콜)가 시작되더라도 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
쇼핑센터 모퉁이에는 주말 저녁마다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는 유명 나이트클럽이 들어섰다. 민소매ㆍ핫팬츠ㆍ트레이닝복 등 노출이 심하거나 격식을 갖추지 않은 의상을 입은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아 한국 나이트클럽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스테이지 옆에 마련된 테이블의 기본 사용료가 한화 기준 60만원을 넘으니 한국 못지않은 가격이다.
리조트에는 1,600석 규모의 공연장도 마련돼 있다. 태양의 서커스 '오(O)', '카(KA)' 등 쇼비즈니스가 라스베이거스 성장의 추진축이 됐다는 점을 떠올려 벤치마킹했다. 리조트 측은 필리핀 정서를 토대로 애크러배틱ㆍ서커스 등이 가미된 비언어극을 준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카지노 객장에는 청년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테이블 게임과 슬롯 머신을 즐기고 있었다. 한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사람보다 가볍게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한국의 강원랜드보다는 라스베이거스에 한층 가까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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